배우 이정은(48)은 tvN '미스터 션샤인'에서 부모를 잃은 김태리(고애신)의 든든한 버팀목 함안댁으로 열연했다. 김태리·신정근(행랑아범)과 보여준 사랑스러운 매력 덕에 '함블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구수한 사투리로 내뱉는 은근한 유머뿐만 아니라 신정근과 애틋한 로맨스, 마지막엔 스스로 의병이 돼 선택한 숭고한 희생까지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줬다.
1991년 연극 '한여름밤의 꿈'으로 데뷔한 이정은은 '라이어' '순우 삼촌' 뮤지컬 '빨래' 등 연극배우로 활발히 활동했다. 그러다 2013년 영화와 TV로 주 무대를 옮겼고 2015년 '오 나의 귀신님' 서빙고 보살 역을 차지게 소화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종횡무진했다. 영화 '곡성' '옥자' '택시운전사' 드라마 '리멤버 - 아들의 전쟁'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역도요정 김복주' '쌈 마이웨이' 등 잘되는 작품엔 항상 이정은이 있었다. 이정은은 "숟가락만 얹었을 뿐"이라며 손사래 쳤다.
-1년여 촬영해 작품의 여운이 길게 남을 듯하다. "'오 나의 귀신님' 끝나고 여운이 길게 남았다. 그런데 이 매체(TV)를 하다 보니 저는 여운이 길게 가는데 시간은 급변하더라. 그 영향력 또한 길지 않더라. 그래서 올라가던 어깨를 내려놨다. 기고만장할 때가 있었는데 '오나귀' 이후엔 작업할 때 열정을 다 쓰고 끝나고 나서는 생각을 안 하게 됐다. 다음 진로를 정하고 빨리 몰입하려고 한다."
-촬영이 길어 힘들지 않았나. "긴 촬영을 이기는 방법은 그 안에서 즐겁게 노는 것이라고 생각해 차에 텐트를 싣고 다닌다. 텐트를 치고 안에서 커피 끓여 먹고 놀았다. 그 기억이 많이 남는다. (김)태리 씨에게 또 텐트 치고 놀자고 얘기했다. 추억이 남는 것 같다."
-사투리를 매우 실감 나게 사용해 화제였다. "사실 서울 출신이라 사투리가 어려웠다. 사투리 쓰는 연기가 몇 번씩 제안이 오는데 쉽지 않았다."
-어떻게 연습했나. "김은숙 작가님이 써주신 걸 읽었을 뿐이다. 경남 진주 출신의 보조 작가님이 썼다. 옛날 어르신들이 말하는 사투리가 대본에 잘 쓰여있었다. 그걸 연기로 옮겨오는 과정에는 사투리 선생님을 모셔와서 매주 연습했다. 마산 출신 선생님이었다. 함안과 매우 가까운 곳이다.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안 그랬으면 잘 해내지 못했을 것 같은데 좋은 선생님을 소개받았다."
-김은숙 작가와 첫 호흡은 어땠는지. "작가님은 일부러 배우를 안 만난다고 한다. 사적인 견해나 사적인 충고가 들어갈까 봐 그렇다더라. 자유롭게 해석하고 감독과 의논해 잘 연기하길 바란다고 했다. 마지막에 뵀을 땐 너무 감사했다. 이미 대본에 인물이 무척 입체적으로 잘 쓰여있었다. 그런 역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했는데 작가님은 오히려 반대로 토씨나 말의 마침표까지 잘 살려주셔서 고맙다고 격려해주셔서 감사했다."
-이응복 감독의 연출 특징은. "화면 구성을 아름답고 예쁘게 하시는 걸로 유명하지 않나. 감독님은 '나는 스토리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이름 없는 의병이 나오는 전개까지 여러 곳에서 노력을 많이 해줬다. 바위산에 이름 없는 무덤이라던가 이런 화면 구성을 잘했기 때문에 이야기가 거기까지 전개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실제 화면으로 만드는 능력이 놀라운 것 같다."
-배우들과 호흡이 좋았는데 애드리브 같은 것도 있었나. "많이 넣지 않았다. 대신 '불란서 제빵소'라고 쓰여 있으면 그걸 사투리로 좀 변화시킨다던가 그런 건 자유롭게 허락됐다. 이응복 감독님은 현장에서 즐거운 장면이 있을 때 함께 재미있어한다. 그래서 배우들은 장기자랑하듯이 으쓱해서 더 하려고 한다. 그런 각자의 장점을 잘 살려줘서 편하게 연기했다."
-함안댁이 왜 의병 활동에 가담하게 된다고 생각했는지. "이한열 열사의 가족들은 그 계기가 개인적인 자식이나 가족들의 사랑에서 출발하는 것인데 저 같은 경우도 작품을 하면서 의병을 먼저 생각한 건 아니다. 작품이 전개되면서 함안댁의 사랑이 고애신에서, 젊은이에서, 미래 세대까지 연결되는 그런 흐름을 체험했다. 제가 특정 이름이 아니라 '함안댁'인 것도 어떤 평범한 사람의 성장하는 이야기로 느껴졌다."
-고애신에 대한 사랑이 미래로 연결이 된 건가. "그렇게 생각했다. 저는 미혼이지만 아이를 키우는 친구 집에 자주 놀러가고 아이에게 늘 관심이 간다. 우리의 후대가 어떻게 사회를 살아갈지, 이런 개인적인 관심이 생기니까 그 역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련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