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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갓모닝] 725. 태풍을 기다리는 마음
1994년 뉴욕에 머물 때 있었던 일이다. 그해 한국의 여름은 유독 더웠다. “한국 날씨는 찜통입니다. 뉴욕은 괜찮습니까?” 내게 이런 안부 전화가 여러 차례 걸려 왔다. 유난히 더웠던 1994년에는 사건도 많았다. 성수대교가 붕괴됐으며 김일성이 사망했다.
1994년 여름의 폭염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낮 최고기온이 섭씨 33도 이상 되는 폭염 일수가 31.1일로 역대 1위로 기록돼 있다. 열사병으로 92명이 숨졌으며, 세균성 질환이나 면역력 질환 등으로 예년보다 많이 숨진 ‘초과 사망자’는 3384명으로 추산됐다.
2018년의 폭염은 1994년보다 한 수 위라고 한다. 1994년엔 8월 초에 찾아온 태풍의 영향으로 두 차례 많은 비가 내렸지만 올해는 태풍도 없었다. 서울은 8월 1일 기준으로 섭씨 39.6도를 기록하며 종전 기록인 섭씨 38.4도를 뛰어넘었다. 이는 1907년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 111년 만에 가장 높은 온도다.
폭염은 물가마저 치솟게 하고 있다. 애호박과 양배추 등 야채 가격은 3~4배나 올랐다. 수박도 2배 가까이 올랐다. 주부들은 장바구니물가에 한숨을 쉬고 있다. 가계비를 줄이고 있다. 생산지에서는 폭염 때문이라며 고개를 젓는다. 비가 내리지 않으니 작황도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태풍을 기다렸다. 일본과 중국으로 비껴간 태풍을 많이들 아쉬워했다. 일단 태풍은 많은 비를 뿌리고 온도를 내려가게 한다. 재해가 걱정되지만 지금 같은 폭염보다 차라리 태풍이 낫다는 의견이 많다. 오죽하면 태풍을 기다리겠냐는 것이다. 아무도 태풍을 기다리고, 또 태풍에 고마워할 줄 몰랐다고들 말한다.
그렇게 기다리던 태풍이 지난주 한반도를 강타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13차례 태풍이 왔지만 제대로 관통한 적은 없었다. 너무 느려서 피해가 컸던 제19호 태풍 ‘솔릭’은 북상하면서 한반도 남쪽에 피해를 줬다. 중형급 세력을 가진 태풍은 일부 지역의 주택과 도로는 물론이고 농가에 많은 피해를 줬다. 하지만 동해로 빠져나가면서 우려했던 것보다 피해가 크지 않아 다행이다.
언젠가 한 지인이 “회장님이 비를 몰고 다니시는데, 제발 비 좀 내리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농담한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소낙비가 내렸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1994년 지독한 폭염이 전국을 강타한 뒤, 1998년 IMF가 찾아왔다. 2018년 가마솥더위가 찾아온 뒤 과연 어떤 국가적 사건이 기다리고 있을지 벌써 걱정된다.
가장 걱정되는 세대는 40대다. 직장이 없는 40대가 너무 많다고 한다. 최저임금이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실업률은 오히려 올라갔다. 40대는 청년도 중년도 아니지만 대한민국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허리가 아닌가. IMF 때보다 더하다는 불경기에 40대는 직장을 잃고 힘들어하고 있다.
요즘 항암 치료를 앞두고 체력을 되찾고자 노력하면서 느낀 것은 진정 무서운 것은 폭염도 태풍도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마음의 불경기다. 기록적인 폭염 재해에도 정부는 전기 요금 소폭 인하라는 대책밖에 마련하지 않았다. 서민을 위한 정책이 오히려 서민들의 살림살이를 팍팍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내년에는 정부가 폭염 재해에 대비해 보다 효과적인 정책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폭염으로 힘들 때일수록 마음에 여유를 갖고 웃음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