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길진의 갓모닝] 702. 마지막 구명시식
지난 5월 27일 마지막 구명시식을 올렸다. 1986년 후암동에서 처음 시작됐던 구명시식은 나의 양력 생일이기도 한 5월 27일을 끝으로 잠정적인 휴식기에 들어갔다. 올해는 많은 의미가 있는 해이다. 부친 차일혁 경무관께서 돌아가신지 60주기가 되기 때문이다.
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버지와 함께 갔던 마지막 금강 나들이가 눈에 선하다. 당시 12살이었던 나에게 아버지는 ‘절대 벼슬하지 마라,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은 반드시 잘 지켜라, 남과의 약속은 70%는 꼭 지켜야 한다’는 말씀을 유언처럼 남기고 돌아가셨다.
그동안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부친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이 학자들의 연구와 출판을 통해 하나 둘 밝혀지고 있다. 전북 정읍 출생이신 차치구 증조할아버지는 실질적인 동학혁명군의 수장이셨다. 차경석 할아버지는 보천교 교주이자 재산의 54%를 상해임시정부, 김좌진 장군, 조만식 선생 등에게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내셨다. 아버지 차일혁 경무관은 제18전투경찰대대 대대장으로 동족상잔의 아픔 속에서도 진정한 휴머니즘을 보여주셨다.
아버지는 일찍이 한국전쟁은 이데올로기 전쟁이 아닌, 강대국의 이권싸움이란 사실을 꿰뚫어 보고 계셨다. ‘이른 아침 들판에 나가 일하는 농부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중간생략) 이 싸움은 어쩔 수 없이 하지만 후에 세월이 가면 다 밝혀질 것이다.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사이에 끼여 벌어진 부질없는 골육상쟁 동족상잔이었다고.’
마지막 구명시식에는 증조할아버지 차치구, 할아버지 차경석, 아버지 차일혁을 위한 구명시식도 함께 했다. 세 분을 위한 구명시식은 우리나라 근대사를 위한 구명시식이기도 했다. 증조할아버지를 모시자 수많은 동학혁명군 영가들이 함께 자리했다. 차경석 할아버지를 모시니 보천교를 함께 하신 분들과 독립운동가 영가들이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모시자 조선의용대시절 함께 전투를 했던 동료들부터 제18전투경찰대대 대원들, 빨치산 영가들까지 나타났다.
인간은 역사를 이길 수 없다. 역사의 거침없는 파도에 희생된 수많은 영가들의 한은 깊었고 눈물은 뜨거웠다. 영가들은 한국 근대사의 해원을 소망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무력하고 무능한 조선왕조를 개탄했던 동학혁명 영가들, 또 다른 나라를 세워 일본과 맞서고자 했던 보천교 영가들과 독립투사 영가들, 그리고 6.25전쟁이라는 민족상잔의 대 비극 속에 쓰러져간 수많은 영가들은 여전히 구천에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마지막 구명시식은 한국 근대사에 희생된 영령들의 해원상생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영령들은 아직도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지 못한 것을 한탄스러워했다. 모든 것에는 천시(天時), 즉 하늘의 때가 있다. 그 시기가 다가오긴 하였으나 아직은 그 때가 아님이 안타까울 뿐이다. 지금은 선조들이 원하는 통일이 이루어져 잘 살 수 있는 상황도 아니며, 통일을 위해 탄 배를 버릴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
얼마 전 '전라도 천년'이라는 책에서‘차치구-차경석-차일혁-차길진’ 4대로 이어지는 내 가족사에 대한 글로 보았다. 그리고 월간잡지 최신호에서 또다시 4대로 이어지는 가족사에 대한 글을 읽게 되니 글을 쓴 분께 고맙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나라가 어려울 때 몸을 아끼지 않았던 가족사처럼 내가 지금까지 수많은 구명시식을 하면서도 해원상생의 화두를 결코 놓을 수 없었던 것도 내 숙명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