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 이승훈의 이름 앞에는 늘 '전설'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누구도 그가 전설의 반열에 올라섰다는 사실에 이견을 제시하지 않는다. 2010 밴쿠버겨울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0m 은메달·1만m 금메달, 2014 소치겨울올림픽 팀 추월 은메달, 그리고 이번 2018 평창겨울올림픽 팀 추월 은메달. 세 번의 올림픽에서 네 개의 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시아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중 가장 많은 메달을 보유하고 있다. 아시아 남자 선수 중 최초로 올림픽 3개 대회 연속 메달 획득 위업도 쌓았다. 체격이 크고 힘이 좋은 유럽이나 북미 국가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장거리 스피드스케이팅이다. 이걸 이겨내고 거둔 성과다.
정작 이승훈은 아시아 선수 최다 메달 기록을 세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이 나서는 모든 경기에서 최고의 기록을 목표로 무던히 달릴 뿐이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 기록을 이어나가는 것" 그게 이승훈의 목표다. 그래서 이승훈의 도전은 앞으로도 계속 되고, 그 때마다 또다른 '전설'이 된다.
당장 다가오는 24일, 이승훈은 또 한 번 전설이 될 예정이다.
이번 무대는 2018 평창겨울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매스스타트다. 이날 오후 강릉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리는 매스스타트는 이번 평창겨울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정식 채택된 종목이다. 매스스타트는 기록 경기인 스피드스케이팅에서 유일하게 순위로 메달 색깔을 결정하는데, 여러 명의 선수가 지정된 레인 없이 400m 트랙을 16바퀴 돌아 경쟁하는 종목이어서 장거리 주행 능력과 함께 순간적으로 상대를 추월하는 쇼트트랙 기술이 승부에 큰 영향을 준다. 쇼트트랙 전향자인 이승훈에게 유리한 종목이다. 실제로 이승훈의 주 종목은 매스스타트로, 이 종목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세계랭킹 1위에 올라있다.
이승훈이 매스스타트에서 워낙 강세를 보이다보니, 그에 대한 견제도 대회를 거듭할 수록 점점 더 심해졌다. 그러나 이승훈은 치열한 레이스를 한껏 즐기며 올림픽만 바라보고 달려왔다. 아시아 최다 메달 기록보다 더 탐나는 '올림픽 매스스타트 초대 챔피언' 자리에 대한 솔직한 욕심 때문이다. "평창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매스스타트인 만큼 올림픽 첫 번째 금메달리스트가 되고 싶다"던 그의 포부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번 대회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매스스타트 금메달에 대한 기대감을 더욱 부채질한다. 막판 스퍼트에 강한 모습을 보이며 5000m 5위, 1만m 4위에 오른 이승훈은 팀 추월에서도 2위를 기록하며 상승세를 보였다. 매스스타트와 팀 추월에 중점을 두고 훈련해왔던 그가 개인 종목인 5000m와 1만m에서 세계 정상급 스케이터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2010 밴쿠버 때부터 이승훈을 지켜봐왔던 한 네덜란드 기자는 1만m 경기가 끝난 뒤 "그는 정말 어메이징한 선수"라며 혀를 내둘렀다. 특히 레이스 막판으로 갈 수록 랩타임이 줄어드는 걸 보며 "8년 전보다 지금이 더 몸상태가 좋은 것 같다"고 경이로워했다.
'맏형' 이승훈과 막내 정재원(17·동북고)의 나이는 무려 13살 차. 그러나 이승훈의 체력은 동생들 못지 않다. 이번 대회 첫 개인 종목이었던 5000m(11일)를 시작으로 나흘 뒤 1만m(15일)를 뛴 이승훈은 3200m를 도는 팀 추월 3경기까지 더해 벌써 2만4600m를 뛰었다. 특히 팀 추월의 경우는 단순히 바퀴 수가 문제가 아니라, 공기 저항을 많이 받아 체력 소모가 가장 큰 맨 앞에서 후배들을 이끄는 '리더십'까지 보였다. 여기에 사흘 뒤 매스스타트까지 뛰어야하니, 누가 봐도 체력적인 부분을 걱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작 이승훈은 태연하다. "한 바퀴 돌 때마다 컨디션이 좋아지는 것 같다"는 말을 거침없이 했다. 한국 관중들의 뜨거운 함성과 응원 속에서 기록을 쑥쑥 끌어올린 그는 "오히려 큰 힘과 자신감을 얻었다"며 "남은 매스스타트도 자신 있게 준비해서 경기에 나서면 좋은 결과를 내리라 생각한다"고 시원시원한 출사표를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