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혁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프로 미지명 후 육성선수로 삼성에 입단했지만 방출된 뒤 고양 원더스와 연천 미라클을 거쳐 NC 유니폼을 입었다. 하지만 1년 만에 팀을 떠나 현재는 독립 야구단 파주 챌린저스에서 또 다른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은 연천 미라클 소속일 때 이강혁의 모습. 이강혁, 연천 미라클 제공 프로야구 선수는 황금알을 낳는 직업이 됐다. 바늘구멍을 통과해 프로에 입단한다면 상황에 따라 수십억원을 벌 수 있다. 이미 FA(프리에이전트) 시장에선 100억원이 넘는 금액이 너무 쉽게 거론되고 있다. FA가 아니더라도 '프로 선수=안정된 생활'을 보장한다. 하지만 양지가 있다면 음지도 만만치 않다. 수많은 선수가 프로도 경험하지 못하고 유니폼을 벗는다. 1군에서 뛸 기회를 좇아 막연하게 도전하는 선수도 적지 않다. 이강혁(26·파주 챌린저스)도 그중 한 명이다.
대구고를 졸업한 이강혁은 201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낙방했다. 어렵게 고향팀 삼성의 육성선수로 들어갔지만 2년 만에 방출. 이후 고양 원더스와 연천 미라클을 거쳐 NC 유니폼을 입었다. 하지만 또다시 1년 만에 방출돼 지금은 파주 챌린저스에서 뛰고 있다. 평균 이상의 공격력을 갖췄지만 수비와 부상이 항상 발목을 잡았다. 유영준 NC 단장은 "타격은 소질이 있는데, 더 치고 올라가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포기는 없다. 두 번의 프로 구단과 세 번의 독립 야구단 생활. 이강혁은 "1%에 희망이라도 있으면 거기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 고등학교 졸업 이후 지명을 받지 못한 이유는.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3학년 때 전국에서 타율 10등(타율 0.347) 정도는 유지했다. 하지만 수비 위치를 바꾸면서 많은 감점을 받지 않았나 싶다. 집이 힘든 상황이어서 대학교에 갈 마음도 없었다. 고등학교 때 승부수를 던졌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 수비 위치를 어떻게 바꾼 건가. "야구를 처음 시작(초등학교 4학년)했을 때는 외야수였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우투좌타가 유행이었는데 타격 스타일에 변화를 주면서 포지션을 내야수로 바꿨다. 이 부분에서 부족하다고 평가했던 게 아닐까. 지금은 3루를 주로 맡고 있다."
- 드래프트 미지명은 예상하기 힘든 결과다. "상위권에 뽑힐 것으로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도 7~10라운드 사이에는 이름이 불릴 줄 알았다. 너무 한곳만 바라보고 야구를 해서 그랬는지 낙담도 컸다. 그때 장효조 삼성 스카우트 팀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았고, 삼성에 육성선수로 가게 됐다."
대구고 2학년 시절 봉황대기에서 끝내기 안타를 치고 동료들의 환호를 받고 있는 이강혁의 모습. 함께 뛰었던 이재학(현 NC)과 정인욱(현 삼성)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IS 포토 - 삼성에 있을 때는 부상이 문제였다. "학교 다닐 때는 아파서 훈련을 빠진 적이 없다. 삼성에 들어간 뒤에도 첫 1년 동안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2년 차 때부터 몸 관리를 잘하지 못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보강 운동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고, 그 영향으로 이곳저곳 아팠다."
-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처음에는 허벅지 안쪽에 통증을 느껴 일주일 정도 훈련을 빠졌고, 이후 어깨 극상근까지 손상돼 한 달 반을 더 쉬었다. 생각하지 못한 부상을 당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뭐라도 보여 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약도 먹어 가면서 참았는데, 결국 허리까지 통증이 심해졌다. 보강 운동만 잘했어도 큰 문제가 없었을 텐데… 1년에 절반 정도를 쉬게 되니까 자포자기하게 되더라. 2011년 9월 말쯤 삼성에서 방출돼 MRI 검사를 받았는데, 사회복무요원 판정이 나왔다. 그래서 바로 다음 해(2012년)에 입대해 군 문제를 해결했다"
- 고향팀 삼성을 나올 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나이도 어렸고, 철도 없었다. 혼자 많이 울기도 했다."
- 삼성 입단 동기는 누구인가. "육성선수로 들어갔을 때 그해 신인 드래프트를 받았던 선수가 김현우·백상원 등이다. 고등학교 졸업 동기는 이재학(현 NC)이다. 나이는 내가 한 살 어린데, 이재학 선수가 고등학교 때 1년 유급해 졸업을 함께했다."
- 삼성에서 나온 뒤 고양 원더스에 간 계기가 있나. "사회복무요원을 마무리하기 3~4개월 전쯤에 kt에서 트라이아웃(2013년 9월)을 진행했다. 그때 지원서를 냈는데, 별다른 회신이 없어서 일주일 휴가를 내고 직접 트라이아웃이 열리는 성균관대를 찾아갔다. 스카우트 담당자께서 1월 사회복무요원이 끝나기 때문에 당장엔 뽑을 수 없다고 하시더라. 그러면서 '1월에 소집해제가 된 뒤에 부르면 올래, 아니면 떨어져도 이번에 평가를 보고 갈래' 묻더라. 고심 끝에 '하고 가겠다'고 말했는데, 첫날 훈련을 하고 난 뒤에 잘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모텔에 들어가서 집에 전화해 '내일 일찍 차 타고 내려가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하다 보니 이틀 동안 청백전을 잘 마무리했고, 스카우트 쪽에서도 1월에 연락을 주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1월에 소집해제가 된 뒤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마냥 기다릴 수 없어서 고양 원더스라는 팀이 있다고 해 지원하게 됐다. 독립 야구단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혼자 훈련하는 것보다 나을 것으로 생각했다."
- 공교롭게도 그해 11월 고양 원더스가 해체됐는데. "원더스에 있을 때 (프로 구단에서 관심이 있다는) 좋은 소식도 좀 있었다. 나름 괜찮게 훈련하고 있었는데 8월쯤 목 디스크가 터졌다. 결국, 그 부상으로 한 달 반을 쉬게 됐다. 잘 치료해서 다시 한 번 도전해야겠다고 다짐했는데, 구단 해체 발표가 나오더라. 원더스에서 정말 원 없이 방망이를 쳤다. 힘들기도 했는데, 내가 언제 이런 식으로 야구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야구를 그만둘 생각은 안 했나.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겨울이 다가오니까 '또 어려움이 시작되는구나' 싶더라. 멍했다."
- 연천 미라클에 입단한 계기는. "2014년 11월 말 고양 원더스가 최종적으로 해체된 뒤 야구를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디서 계속 야구를 할 수 있을까 알아보다가 연천 미라클이 생겼다는 기사를 보고 바로 지원했다."
NC 시절 이강혁의 모습. 연천 미라클에서 NC의 부름을 받았지만 1년 만에 팀을 떠나게 됐다. 유영준 NC 단장은 이강혁에 대해 "타격에는 소질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NC 제공
- NC에 입단했는데. "연천 미라클에서 뛰던 2015년 9월쯤에 NC 스카우트 3명이 경기를 보러 오셔서 '11월에 테스트가 있다'고 하시더라. 연천 미라클 1기가 10월에 마무리됐는데, 따로 훈련하다가 테스트를 보러 갔다. 이틀 동안 열린 자체 청백전에서 3할대 타율에 홈런까지 기록했다. 그러면서 바로 입단 계약까지 하게 됐다."
- 어렵게 다시 잡은 기회인데 살리지 못했다. "2016년 시범 경기 때 1경기를 뛸 정도로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몸이 프로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했다. 입단 뒤 초반에는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다. 트레이닝 파트에서 조급해하지 말라고, 후반기에 괜찮아 질 것이라고 조언해 주셨는데 실제 후반기 때는 타격감이 괜찮았다. 정규 시즌이 끝난 뒤 2군이 있는 고양에서 자체 교육 리그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1군이 한국시리즈에서 4연패로 탈락하면서 2군 훈련 일정도 올 스톱이 됐다."
- 그 뒤에는 어떻게 됐나. "개별 연락이 따로 오면서 마무리 훈련을 할 선수는 창원으로 내려와서 하면 됐는데, 방출 명단 5명에 이름을 올렸다. 0.1%도 생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주변에서도 놀라는 눈치였다. 적응을 시작해서 컨디션이 점점 괜찮아지는 단계였기 때문에 방출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구단 관계분들께 다 인사를 하고 팀을 나왔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니까 어김없이 또 시련이 오더라.(웃음)"
- 곧바로 파주 챌린저스에 들어갔다. "NC를 나오면서 '이번에는 또 어디서 야구를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 포기하기엔 아직 이르다는 결론을 내렸다. 스물일곱 살이었다. 1년 정도는 더 뒷일 생각하지 않고 부딪혀 봐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러던 찰나에 파주 챌린저스가 생긴다는 소식을 들었다."
- 파주 챌린저스에선 주전인가. "선수단이 약 40명 정도다. 스쿼드가 2개 나올 수 있어서 경기를 나눠 뛰었다. 이번 경기에 내가 뛰면 다음 경기엔 다른 선수가 뛰는 개념이다."
-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없나. "독립 구단에 있으면 항상 위기가 있다. 처음에는 큰 포부를 갖고 들어오지만 몇 개월이 지나면 그게 흐트러질 때가 있다. 야구가 좋아서 왔지만, 살짝 자괴감 비슷한 게 생기더라. 일종의 상실감이다. 하지만 난 이제 이런저런 경험이 많기 때문에 그게 크지 않다. 잘 버텨 보자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지낸다."
-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매년 뭔가 발전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크진 않지만, 빛이라는 걸 한 번씩 보게 되니까 손 닿을 수 있는 거리에 1군이 있는 것 같았다. 지난해 시범 경기를 한 경기 뛰었던 것도 '아, 나를 지켜봐 주는 사람들이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몸이 아프거나, 없는 재능을 꺼내 억지로 끌고 가는 게 아니라면 계속 도전해야 한다."
파주 챌린저스에서 뛰고 있는 이강혁의 모습. 고양 원더스와 연천 미라클 유니폼을 입었던 이강혁에겐 세 번째 독립 야구단이다. 이강혁 제공 - 답답하진 않나. "정말 답답하다. 그렇다고 마냥 답답하다고 해서 주저앉을 수 없는 노릇이다. 흔히 이야기하지 않나 '다 때가 있다'고. 그게 난 언제인지 모르지만, 하루하루 열심히 할 뿐이다. 내일에 대한 생각은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잘못하면 무기력해질 수 있다. 언젠가 올지 모르는 때를 위해서 하루살이처럼 살아 보자는 생각이다. 내일 생각 없이 오늘을 열심히 살면 뭐가 오지 않을까."
- 스스로 생각하는 장점은. "공격이다."
- 막연한 기다림의 연속인데. "준비하는 것은 선수의 몫이다. 1%의 희망이라도 있으면 거기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막연한 운에 기대는 것보다 운이 왔을 때 잡을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
- 이강혁에게 야구는 어떤 의미인가. "야구를 하면서 마음이 강해졌다. 인생 공부를 야구 경기 하면서 배운 것 같다. 이제는 어떤 웬만한 일이 있어도 잠깐 주춤거릴 순 있어도 당황하지 않는다. 야구는 내게 엄청난 선생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