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운동 기간 중 여러 후보들이 야구 유니폼을 입었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롯데와 해태 유니폼을,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는 KIA와 SK 유니폼을 입었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군산상고 유니폼과 모자를 선물 받았고,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는 삼성 유니폼을 입은 딸과 함께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를 찾았다.
프로야구가 더 일찍 시작된 일본에서도 흔한 일이다. 이를 두고 '유니폼 쇼'라고 한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일본 정계에서 쓰이는 은어다.
2000년대 후반 내각 총리를 지냈던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는 2009년 9월 26일 G20 회의 참석을 위한 방미 중 피츠버그 PNC파크를 찾아 시구를 했다. 원정팀은 일본인 투수 구로다 히로키가 소속된 LA 다저스였다. 구로다는 하토야마 총리와 환담을 나눈 뒤 총리의 이름과 18번이 새겨진 다저스 유니폼을 선물했다. 직후 하토야마 총리의 행동은 남달랐다. 구로다가 선물한 다저스 유니폼을 입지 않고 손에 든 상태에서 사진 촬영만 했다. 그는 “피츠버그에서 상대팀 유니폼을 입을 순 없다”며 피츠버그 구단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고도로 계산된 행동이었다고 한다. 당시 현장에 있던 한 일본 칼럼니스트는 "피츠버그 거주 일본인들의 요청이 있었다”고 했다. 피츠버그 거주 일본인들은 총리에게 미·일 교류 사업 활성화를 요청했고, 이에 따라 총리는 피츠버그 시민들을 존중한다는 뜻의 퍼포먼스를 한 것이다. 하토야마 총리는 방미에 앞서 피츠버그에서 잠시 뛰었던 전 요미우리 스타 투수 구와타 마스미와 총리실에서 간담회를 열기도 했다.
아베 신조 현 총리도 '유니폼 쇼'에 능하다. 닛칸스포츠 소속의 한 기자는 “아베 총리가 유니폼 쇼를 가장 많이 이용한 주인공일 것”이라고 했다. 2013년 5월 5일 아베 총리는 등번호 96번이 새겨진 요미우리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고 도쿄돔에 모습을 드러냈다. 요미우리의 전설인 나가시마 시게오와 마쓰이 히데키가 국민영예상 수상을 기념해 시구와 시타를 했다. 아베 총리는 심판 역할이었다.
아베 총리는 '96대 총리'다. 하지만 그보다는 헌법 개정을 규정한 '헌법 96조'를 가리킨다는 해석이 많았다. 아베 총리는 알려진 대로 헌법을 개정해 '전쟁이 가능한 일본'을 추구한다. 당시 진보 성향의 일본 매체들은 아베의 유니폼 착용을 비판했다. 한 매체는 “일본의 최고 스포츠인 야구의 영웅들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그런 유니폼을 입고 얼굴을 비쳤다는 것이 불쾌하다. 노골적인 평화 헌법 개정 의지 피력이다”라고 했다.
아베 총리는 지난 2014년 총리관저로 우에하라 고지와 타자와 준이치를 불렀다. 두 선수는 2013년 월드시리즈 우승팀인 보스턴 레드삭스의 멤버였다. 이 자리에는 보스턴 구단에 요청한 마스코트와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도 함께 있었다. 닛칸스포츠의 기자는 "마치 '쇼군' 같은 면모를 보여 주려 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우에하라와 타자와가 아베 총리에게 트로피를 건네는 장면에서 전리품을 쇼군에게 바치는 장수를 연상했다는 것이다. 월드시리즈 트로피는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기 전 아베 총리가 먼저 사진을 찍은 뒤 이동됐다고 한다.
2015년 방미 때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소속인 아오키 노리치카를 만나 유니폼을 들어 올렸다. 아오키는 스즈키 이치로나 다르빗슈 유 같은 슈퍼스타급은 아니다. 그렇다면 일본 총리들은 어떤 식으로 방미 중에 메이저리거들과 접촉할까.
탬파베이 출신 이와무라 아키노리는 "총리의 방미 일정이 잡히면 인상 깊은 활약을 하는 선수들에게 연락이 간다. 그리고 일정을 확인한다"고 답했다. 그는 팀 내 최다 안타를 쳤던 2008년에 총리실로부터 문의를 받았다고 했다. 일정이 맞지 않아 총리와 만남은 불발됐다. 강압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이와무라는 “보통 대도시 연고 팀에서 뛰는 선수들을 먼저 생각하는 것 같다. 탬파베이의 누구보다는 뉴욕이나 보스턴, 샌프란시스코의 누구가 더 듣기 좋지 않을까"라며 "특히 아베 총리의 경우 방미 때 거의 무조건 메이저리거들에게 연락이 가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프로야구만이 정치인들의 관심사는 아니다.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는 지난 3월 '봄 고시엔'에 도쿄 대표로 출전하는 고교 야구 두 개 팀 선수단을 도쿄도청으로 불러 격려했다. 도쿄는 2020년 올림픽 개최지다. 이 대회에서 야구가 정식 종목으로 부활한다. 일본은 야구 금메달 획득을 올림픽 성공의 지표로 삼는 분위기다. 올림픽 개최 도시의 책임자로서 미래의 야구 스타들을 만난 건 상징성이 크다.
이렇듯 일본에서 야구와 정치는 가깝다. 야구의 인기는 정치인에게 도움이 된다. 어떤 정치인은 야구를 자신 앞으로 불러 모아 '강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려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