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와 최순실이라는 '미신적인' 인물들로 온 나라가 떠들썩해진 작년 가을, 야구팬들은 월드시리즈를 보고 있었다.
최종 7차전이 연장전까지 간 역사적인 명승부는 시카고 컵스에 108년 만의 우승을 안겨 줬다. 2016년 컵스의 우승으로 메이저리그 3대 '저주'는 모두 풀렸다. 2005년 88년 만의 우승으로 '블랙삭스의 저주'에서 해방된 시카고 화이트삭스, 2004년 86년 만의 우승으로 '밤비노의 저주'를 깨 버린 보스턴 레드삭스에 이어 컵스도 '염소의 저주'에 종지부를 찍었다.
구장에 염소의 입장을 불허했다는 '동화적인 구전'이나, 베이브 루스를 양키스에 팔아 버린 '불경스러운 거래'와 달리, '블랙삭스 스캔들'은 메이저리그의 가장 치욕적인 흑역사로 남아 있다. 1919년에 열린 월드시리즈에서 화이트삭스 선수 8명이 도박사들과 공모해 승부 조작을 벌여 신시내티 레즈에 우승을 넘겨준 사건이다.
그런데 2007년 흥미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시카고 역사 박물관은 '블랙삭스 스캔들' 관련 법정 녹취록을 입수했다. 피의자 중 한 명인 화이트삭스 투수 에디 시코티는 1921년 법정에서 "컵스 선수 몇 명이 1만 달러를 받고 1918년 월드시리즈 승부를 조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메이저리거들의 연봉은 그들의 고용주보다는 그들을 응원하는 노동 계급의 소득에 가까웠다. 참고로, 1918년 신형 포드 승용차의 가격은 360달러였다.
월드시리즈 파업
1918년은 미국사에서 매우 불안한 해였다. 유럽에서 일어난 세계대전의 확전으로 미국은 참전을 결정했다. 언제 전쟁터로 징집될지 몰랐던 미국 청년들처럼 야구선수들도 심란했다. 바로 전해인 1917년에는 러시아혁명이 일어났다. 그 여파로 미국에선 반공 사상과 국가주의가 퍼졌다. 연방 정부도 '선동금지법(Sedition Act Of 1918)'을 통과시키며 공안 정국을 조성했다.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도심 지역의 사회간접자본은 열악했다. 사회경제적인 불평등으로 대도시에선 잊을 만하면 '빨갱이'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18년에는 전 세계적으로 '스페인 독감'이 유행했다. 미국 인구의 25%가 감염됐고, 67만5천여 명이 사망한 무시무시한 전염병은 민심을 더 흉흉케 했다. 미국 사회는 이전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전쟁 때문에 메이저리그는 정규 시즌을 단축해 9월 1일에 마쳤다. 시카고 컵스와 보스턴 레드삭스가 맞붙은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가 울려 퍼졌다. 전쟁이 지속되면 메이저리그가 중단될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컵스는 홈구장 대신 관중석이 더 많은 화이트삭스의 코미스키파크를 썼다. 불필요한 조치였다. 총 6경기 중 한 번도 관중이 3만 명을 넘지 못했다. 미국인들은 관심은 야구보다 시국에 있었고, 스타 선수들의 연이은 군 입대로 메이저리그 관중은 시즌 중반부터 내리막이었다.
시카고에서 3차전까지 마친 컵스와 레드삭스 선수단은 같은 기차를 타고 보스턴으로 이동했다. 장거리 여행을 하며 선수들은 월드시리즈 배당금으로 받을 수입을 따져 봤다. 우승팀엔 선수 1인당 1100달러, 준우승팀엔 600달러가 지급된다는 계산이 나왔다. 사전에 구단 측으로부터 약속받았던 금액에 턱없이 모자랐다. 선수들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불만이 극에 달한 선수들은 보스턴에서 열린 5차전에서 '기습 파업'을 시도했다. 월드시리즈를 보기 위해 펜웨이파크에 모인 관중은 1시간이 지나도 경기가 시작하지 않자 술렁였다. 일부 선수들은 아예 유니폼도 입지 않고 있었다. 선수들은 며칠 전부터 두 팀 구단주와의 면담을 요구해 왔지만 답은 없었다. 대신 야구계의 절대 권력자였던 아메리칸리그 회장 반 존슨이 나타나 선수 대표들을 겁박했다.
"미국은 지금 전쟁 중이다. 국민들은 야구로 위로를 받고 있다. 그런데 먹고 살 만큼 버는 너희들이 불법 파업으로 월드시리즈를 중단시키겠다고? 국민이 너희를 용서할 것 같으냐? 애국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지금 당장 경기를 시작해라."
여론의 지지도 없는 파업을 노조가 없는 선수들이 강행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선수들은 어쩔 수 없이 라커 룸을 나와 5차전에 임해야 했다. 시대는 선수들의 편이 아니었다. 입대 전의 청춘은 불안하다. 그런 그들이 속고 착취당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렇지 않아도 선수들은 불공정하고 불투명한 수익 배분 문제로 시즌 내내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전시 규제로 경마장이 휴업하자 도박꾼들의 돈은 야구로 몰려 왔다. 일부 메이저리거들이 부당 거래에 연루됐다는 소문은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렇듯 1918년의 메이저리그는 비리가 싹트기에 충분한 토양을 갖추고 있었다.
달리 보면 승부 조작은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구단 측의 계약 불이행과 협상 거부, 불공정한 노사 관계에서 비롯된 노동 착취, 선수들의 교섭 능력 부재와 대중의 무관심은 선수들에게 부정행위를 저지를 여건과 동기를 제공했다. 이런 상황에서 현금 1만 달러를 받고 승부 조작에 동참하라는 유혹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고용주는 버젓이 수익을 횡령하는데 피고용인은 왜 바보처럼 손가락만 빨고 싶었겠는가. 어차피 재주는 곰이 다 부렸다.
두 도시의 이야기
1918년에 열린 월드시리즈는 6차전까지 갔다. 레드삭스가 승리한 네 경기는 모두 1점 차의 박빙 승부였다. 6경기의 기록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크게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수상한 플레이를 한 선수는 많았지만 가장 의심스러운 이는 컵스 우익수 맥스 플랙이었다. 둘째, 시카고에서 열린 첫 세 경기에선 미심쩍은 점이 없었다. 하지만 보스턴으로 옮긴 4차전부터는 승부 조작의 흔적이 수두룩했다.
4차전은 나름 박력 있게 시작했다. 1회초, 컵스의 선두 타자 플랙은 레드삭스의 선발투수 베이브 루스를 상대로 시원한 우전 안타를 뽑아냈다. 그러나 잠시 후 1루에서 떨어져 서성이던 플랙은 포수 견제구에 걸려 아웃됐다. 그리고 3회초, 2루 주자 플랙은 투수 루스의 견제구에 다시 어처구니없이 걸리고 말았다. 월드시리즈 역사상 한 경기에서 한 선수가 견제구로 두 번 아웃된 사례는 플랙이 유일무이하다.
진짜 엽기적인 상황은 4회말에 벌어졌다. 2사 1·2루. 타석에는 루스가 들어섰다. 좌타자 루스를 의식한 컵스 투수는 너무 얕게 수비 위치를 잡은 우익수 플랙에게 뒤로 물러나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플랙은 뒷걸음질 치는 시늉만 했다. 곧이어 루스는 플랙의 머리를 훌쩍 넘기는 우중간 3루타를 쳤다. 그렇게 얻은 2타점으로 레드삭스는 4차전을 3-2로 승리할 수 있었다.
시리즈 최종전이 된 6차전에서 플랙은 더 노골적인 에러를 범했다. 3회말 2사 2·3루. 평범한 우익수 플라이를 플랙이 떨어뜨리며 레드삭스는 2점을 쓸어 담았다. 결국 보스턴은 그날 2-1로 승리해 1918년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됐다. 1918 월드시리즈의 양 팀 전력을 비교한 야구 역사학자들은 공수 모든 면에서 컵스가 우세했다고 평가한다. 객관적으로 컵스는 1918년 월드시리즈를 이기고도 남을 강팀이었다.
공교롭게도 1918년 월드시리즈가 끝난 뒤 두 도시의 세 팀은 각각의 '저주'에 걸려 남은 20세기 동안 다시는 우승하지 못했다. 시카고와 보스턴의 많은 팬들은 동병상련을 느끼며 그 긴 세월을 응원팀의 '저주'를 풀기 위해 온갖 '주문'을 외우며 애타게 기다려야 했다(정작 '저주'의 당사자 루스는 생전에 자신이 유일하게 믿는 미신은 홈런을 친 후 모든 베이스를 밟는 것밖에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21세기에 밝혀진 역사적 사실들을 종합하면, 메이저리그의 '3대 저주'는 모두 1918년 월드시리즈라는 동일한 뿌리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1918년 '재미'를 본 컵스 선수들이 같은 도시의 화이트삭스 동료들에게 승부 조작을 전수했고, 1919년 '블랙삭스 스캔들'이 일어났다는 건 합리적인 추론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정황 증거들은 이미 충분히 드러났다.
1918년 월드시리즈 승부 조작 의혹을 제기한 시코티의 증언은 세간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사법 당국은 국민스포츠(National Pastime)인 야구에서 일어난 범죄를 1919년 '가을 고전'(Fall Classic)에 먹칠을 한 '블랙삭스' 8인에만 한정 지었다. 조사와 처벌은 졸속으로 처리됐다. 이미지에 치명타를 입은 메이저리그도 야구 산업 전반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스캔들을 축소하고 감추는 데 급급했다. 그 시절 그 누구도 이런 작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래도 야구는 아름답다.
메이저리그의 '3대 저주'는 미신이 아닌 비리에서 잉태됐다. '저주'의 발단은 승부 조작이었지만 원인은 불공정한 사회와 불안정한 시대였다. 그리고 '저주'는 체계적인 은폐와 대중의 무지로 오랜 기간 연명할 수 있었다.
1918년의 미국처럼 2017년의 대한민국 역시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어쩌면 우리는 '박정희 신화'라는 미신 또는 '저주'에 사로잡혀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어수선한 시국에도 프로야구를 기대한다. 세상에는 아직 공정한 승부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또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주문을 외워 본다. 올여름에는 국민들의 환호를 받는 대통령이 패기 넘치는 시구를 할 것이다. 이제는 우리도 '저주의 시대'를 벗어나 새로운 시대에 안착할 것이다. 꼭 그렇게 될 것이다.
정승구 영화감독*작가: 컵스와 레드삭스를 좋아한다. 유년기부터 청년기까지 시카고와 보스턴을 오가며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