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5일 일본프로야구(NPB) 실행위원회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회의에 참석한 한 구단의 모기업 관계자로부터 들은 말이다. 당시 미국 대선 전망은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 우세였다. 일본 정부도 비슷한 예상을 했다. 공화당의 트럼프 후보와는 이렇다 할 접점이 없었다.
지난 9일(한국시간) 트럼프는 예상을 뒤엎고 제45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전세계가 패닉에 빠졌다. 친힐러리 성향의 아베 신조가 총리로 있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투표일 전부터 일개 프로야구 차원에서 트럼프 당선을 전제로 한 대응이 논의됐다는 점은 흥미롭다.
시구 발언의 배경은 이렇다. 트럼프는 뉴욕 양키스의 팬이자, 2011년 뉴욕 메츠 구단 인수를 검토한 적이 있다. 야구를 좋아한다는 작은 접점으로 미국 차기 대통령을 연결하려 한 것이다.
일본은 서양세계, 특히 미국에 대한 역사적인 콤플렉스가 있다. 1853년 미국의 매튜 페리 제독이 이끈 전함 4척이 도쿄 앞 바다에 닻을 내렸을 때부터 시작됐다. 야구는 개국 뒤 서양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일본의 국기로 변화했다. 2차대전 종전 뒤 미국 진주군은 일본 전역에서 무기를 몰수했다. 여기에는 일본도 수십만 자루가 있었다. 지금 일본에는 수십만 자루 야구 배트가 있다. "야큐(야구의 일본식 이름)는 베이스볼과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그 연원이 미국 문화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2차대전 종전 이후 일본은 제국에서 미국의 하위 파트너 역할을 받아들여야 했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시구는 흥행을 위한 퍼포먼스 성격이 강하다. 일본 야구에선 정치적 맥락도 있다. 2013년 5월, 국민영예상을 수상한 나가시마 시게오와 마쓰이 히데키가 시구·시타자로 나섰다. 심판 역할을 맡은 이는 아베 총리였다. 당시 아베 총리는 96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었다. 그가 96개 일본국 총리기도 하지만, 헌법 96조 개헌 의지로 해석하는 이들도 많았다. 아베 총리는 평화헌법 무력화를 시도하고 있으며, 헌법 96조는 헌법개정에 관한 요구사항을 담고 있다. 한 일본 매체는 시구에 대해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미국 정치인에게 시구를 부탁하는 일은 일본 야구 전통에서 낯선 일이 아니다. 2009년 도쿄돔에서 열린 일본시리즈 3차전 시구자는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었다. 미·일 외교에서 파트너였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도 배석했다. 그 한 달 전에는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메이저리그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의 홈구장 PNC파크에서 시구를 하기도 했다.
2014년 3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홈 개막전에선 캐롤라인 케네디 주일미국대사가 시구자로 나섰다. 케네디 대사는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장녀다. 그는 이해 5월 라쿠텐 골든이글스 홈경기, 11월 미·일올스타전에서도 시구자로 초청됐다.
케네디 대사는 2013년 11월 부임식에서 일왕 내외와 총리, 장관을 앞에 두고 짧은 스커트 차림으로 나섰다. 야스쿠니신사 참배와 고래잡이 등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이 때문에 미·일 관계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시구 초청이라는 해석이 있었다. 일본 야구계와 정치권이 합심한 것이다. 시구 경기도 일본 최고 인기팀 개막전, 동일본대지진 부흥, 미·일 교류 등 '명분'이 있었다. 11월 미·일올스타전 시구에서는 일본야구의 전설인 오 사다하루와 함께 하기도 했다.
"트럼프에게 시구를…"이라는 말이 농담삼아 나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야구'와 '미국'이 일본의 역사에서 갖는 의미를 고려하면 실현 가능한 일이다. 상상해보자. '괴짜' 트럼프는 일본 야구장 시구에서 어떤 공을 던질까. 아마도 스크루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