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보배(28·광주시청)의 눈이 반짝였다. '딱 10년 뒤 서른 여덟 살이 된 자신의 모습이 어떨 것 같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잠시 생각하던 그가 예상 밖의 답을 꺼냈다. "유승민 선배를 보면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을 꿈꾸게 됐어요. 모든 체육인들의 꿈이기도 합니다."
조심스러웠지만 진중한 어조였다. 기보배는 한국을 넘어 세계 최고의 궁사다. 2012 런던올림픽 단체전과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데 이어 2016 리우 올림픽에서 단체전 우승을 차지하며 3관왕에 올랐다. 세계는 리우대회 개인전에서 동메달까지 가져간 기보배에게 찬사를 보냈다.
일간스포츠는 지난 12일 제 97회 전국체육대회에서 기보배를 만나 쏜 화살처럼 지나간 지난 8~9월과 궁사가 아닌 '여자 기보배'의 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타고난 노력파… IOC 위원 꿈꿉니다 스포츠계에는 타고난 재능과 신체조건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하는 사람이 많다. 이른바 '천재'들이다. 기보배는 어떨까. 올림픽 무대에서 3관왕에 올랐을 정도라면 태어날 때부터 활 쏘는 재주를 갖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기보배는 "저는 다른 선수들보다 더 노력하는 선수에요. 열심히 하면 그만큼 좋은 결과를 얻고 메달을 딸 수 있는 그 '맛' 또한 알죠. 게을러지지 않고 스스로 채찍질을 하는 이유에요"라고 했다.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매기는 점수도 박하다. 올림픽에서만 4개의 메달을 갖고 있는 그는 "내 양궁인생은 80점"이라고 했다. '100점을 줘도 뭐라고 하는 사람 없다'며 그렇게까지 겸손할 필요가 없다고 반문하자, "리우 대회 개인전에서 동메달을 땄어요. 물론 좋은 성적이었지만, 프로는 성적이 중요해요. 그 아쉬움 때문에 20점을 깎았어요"라는 설명이 따라왔다.
한국 팬들은 4년 뒤 올림픽에서도 기보배를 보고 싶어 한다. 양궁은 육상이나 피겨, 체조 등의 종목과 비교해 선수 생명이 긴 축에 든다. 야무지게 훈련하고 관리하는 기보배라면 2020년 올림픽도 노려볼 만하다. 선수생활을 연장하는 건 모든 프로 선수의 꿈이다. '사격의 신'으로 불리는 진종오(36·kt)는 "제발 은퇴하란 말은 하지 말아 달라"며 욕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기보배는 사뭇 달랐다. "솔직히 지금 당장은 도쿄올림픽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벌써 4년 뒤를 생각 하고 준비하면 지쳐요. 그때도 제자리에서 열심히 활을 쏘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태극마크를 달 기회가 오겠죠. 저는 그 기회를 잡을 뿐이고요"라고 했다. 지금껏 그랬듯 충실하게 현실을 살아나가면 도쿄 대회 출전도 찾아오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제 시계보다는 나침반을 보고 걷는다. 기보배는 10년 뒤 IOC 선수위원에 도전하는 계획이 있다. 아직 너무 먼 이야기고 조금은 쑥스럽지만,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도달할 수 있다는 은근한 믿음이 있다. 그는 "10년 뒤 IOC 선수위원에 도전하고 싶어요. 유승민 선배가 처음 도전하실 때 가까이에서 보면서 응원을 많이 했어요. 사실 이번에는 한국에서 선수위원이 나올 거라는 예상을 많이들 못했죠. 그런데 선배님 당선을 보면서 '하려고 마음먹고 덤비면 된다'고 생각하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양궁 종목은 타 종목과 비교해 체계적인 선수 지원과 육성 시스템을 갖췄다고 평가된다. 기보배는 그 중심에 서 있었다. IOC 선수위원이 돼 척박한 토양에서 땀을 흘리는 선수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게 그의 포부다.
◇경리단 길에서 커피, 친구들과 수다 기보배의 애칭은 '미녀궁사'다. 뽀얀 피부와 웃을 때 초승달처럼 착한 눈매가 가수 채연을 연상시킨다고 해 '양궁계 채연'으로 불리기도 했다. 양궁장 밖에서 보는 그는 여느 20대 아가씨처럼 곱고 발랄하다. 하지만 그간 세계 최고의 궁사와 국가대표라는 타이틀을 지켜내기 위해 평범한 삶을 살아보지 못했다.
리우 올림픽이 열린 2016년도 그랬다. 기보배는 오는 11월 초순께 국내 대회 일정을 마감하고 다시 치열한 동계훈련에 돌입한다. 기보배는 "저희는 3월에 대표팀 선발전을 시작으로 11월까지 쉼 없이 대회가 잡혀 있어요. 올림픽이라도 있는 해에는 훈련이 더 팍팍합니다. 또 대회가 끝나면 여러 행사에 다녀요"라고 했다.
올해부터는 조금 달라지기로 했다. 동계훈련 사이 주어지는 짧은 휴가는 온전히 기보배만을 위해 쓰겠다는 계획이다. 약 3주간의 기간 동안 가장 먼저 할 일은 영어공부다.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국제대회를 소화하면서 영어의 중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휴식기가 생기면 영어 학원에 다니고 싶어요. 해외에서는 기본이고 정말 필요하거든요. 원래 운동이면 운동, 공부면 공부 하나만 몰두하는 타입이에요. 겨울에 휴식기가 주어지면 학원 다니면서 영어 실력을 늘려볼까 해요"라고 말했다.
못 만난 친구들을 만나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이야기 꽃을 피워보고 싶기도 하다.
"요즘 이태원 인근의 경리단길이 유명하다잖아요. 저는 사실 경리단길에 거의 못 가봤어요. 처음 거리명을 듣고는 '경리단길? 그게 뭐지? 이름이 참 촌스럽다' 했죠.(웃음) 그런 곳 가서 예쁜 카페에서 커피 마셔 보고 싶어요. 늘 시간이 맞지 않았던 고등학교 친구들도 만나서 수다 떨면서 추억도 만들고요."
그러면서 그는 "참, 저는 그 흔한 한강도 안 가봤어요. 축제요? 최근에 불꽃축제 했죠? 항상 그 축제는 전국체전이 열릴 때 하더라고요. 아 맞다. 저 3주 동안만 정말 원없이 자고 싶어요. 원래 잠이 많은 편이거든요. 고민 없이 마냥 자고 쉬면 얼마나 좋을까요"라며 쉴새 없이 소박한 희망사항을 나열했다.
이제 더욱 완전한 기보배를 향해 전진하는 일만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끝으로 "리우 올림픽 뒤 마음의 여유가 생겼어요. 더 이상 얻을 것도 또 잃을 것도 없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제 남은 삶은 제 미래를 위해 발전할 수 있는 시간으로 채우고 싶어요"라며 유난히 또랑또랑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