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스 하퍼(워싱턴)가 독보적이었던 지난해 내셔널리그(NL) 같은 경우라면 별 논란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퍼는 지난해 리그 홈런 1위(42개)에 출루율과 장타율을 합친 OPS도 1위(1.109), 대체 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WAR)도 1위(9.5, ‘팬그래프’ 기준)를 차지했다. 마땅한 경쟁 상대가 없었던 하퍼에게 1위 표가 몰리며 역대 최연소 만장일치 MVP가 탄생했다.
반면 아메리칸리그(AL)에선 2012년 이후 계속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재미있는 점이 있다. 논란 당사자 중 한 명은 5년째 같은 인물이다. LA 에인절스의 주전 중견수 마이크 트라웃(25)이다.
트라웃에 대한 설명은 ‘세계 최고의 야구 선수’라는 한 문장으로 충분하다. 트라웃은 데뷔 2년차인 2012년부터 올해까지 5년째 에인절스의 주전 중견수로 나서고 있다. 5년 중에서 가장 부진했던 시즌이 2014년이다. 그런데 그 해 트라웃은 생애 첫 AL MVP가 됐다.
트라웃은 통계전문사이트 팬그래프의 AL WAR 순위에서 5년째 시즌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2014년을 제외한 3번 동안 트라웃은 MVP 투표 2위에 그쳤다. 기록 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때마다 이유는 항상 똑같았다. MVP에 오른 미겔 카브레라(33)와 조시 도날드슨(30)이 속한 팀(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토론토 블루제이스)은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트라웃이 속한 팀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팀의 승리에 보탬이 되지 않는 개인 기록은 의미가 없다는 맥락이 그 바탕에 깔려있다.
논란은 바로 이 맥락에서 출발한다. MVP(Most Valueable Player)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가장 가치있는 선수’를 뜻한다. 기록 상으로는 트라웃이 2012년부터 2015년까지 MVP 4연패를 달성했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도날드슨과 기록이 비슷했던 지난해를 제외하더라도 3년 연속으로 트라웃은 공격, 수비, 주루를 종합했을 때 가장 가치있는 선수였다. 그러나 이런 기록이 개인의 힘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팀 성적을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팀의 패배 앞에서 개인의 영달은 의미가 없다는 그 맥락 때문이다.
트라웃이 MVP를 차지했던 2014년은 이런 논리가 통할 수 없던 한 해였다. 그해 에인절스는 98승으로 아메리칸 리그 서부지구 1위를 차지하며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트라웃의 개인 성적은 이전 2년 동안보다 뒤쳐졌지만, 그럼에도 리그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올해 트라웃은 비슷한 시나리오를 4번째 겪을 것으로 보인다. 트라웃은 9월 26일까지 AL에서 타율 5위(0.318), OPS 2위(0.997), 평균 대비 조정 득점 생산력(wRC+) 1위(171), WAR 1위(8.8)에 올라있다. 올해도 수치상으론 단연 최고다. 그러나 MVP 후보 1위로 꼽히는 이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주전 중견수인 무키 베츠(23)다.
베츠의 생산력이 트라웃에 비해 크게 모자라는 것은 아니다. 선수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WAR은 아메리칸 리그 2위(7.4)에 해당하고, OPS는 8위(0.903)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수비 기여도는 트라웃보다 더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올해 아메리칸 리그의 최고 야수를 뽑는다면 베츠는 반드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야 할 선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츠의 종합적인 생산력, 특히 타석의 생산력은 트라웃에 확연하게 밀리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베츠가 지금 MVP 후보 1순위로 꼽히는 것은 결국 팀 성적의 차이 때문이다. 지난 4년간 3번이나 트라웃이 고배를 들게 했던 것과 같은 이유다.
베츠의 소속팀, 보스턴은 AL 동부지구 1위를 수성하며 포스트시즌 진출이 유력하다. 반면 트라웃의 에인절스는 서부지구 4위에 처져 있다. 지난 역사를 되돌아볼 때, MVP 투표권을 지닌 기자 30명이 팀 성적을 무시하고 투표를 할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가장 가치있는 선수’가 ‘가장 뛰어난 팀’에서만 나와야 하는 걸까. 야구에는 개인의 힘만으로 이룩할 수 없는 기록들이 넘쳐난다. 투수의 승리, 타자의 타점이 대표적인 예시다. 과거에는 다승왕이 최고의 투수였고, 타점왕이 가장 팀에 보탬이 된 타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잘 던지고도 승리 투수가 되지 못하는 일, 아무리 잘 쳐도 주자가 나가지 못해 타점을 못 얻는 일이 야구에는 일상다반사다.
올해 에인절스는 투타 양면에서 총체적인 난국을 겪고 있다. 팀 OPS는 아메리칸 리그 11위에 그치고 있다. 선발 투수진의 평균자책점은 리그 12위, 이닝 소화량은 리그 14위에 불과하다. 에인절스는 지난 몇 년간 유망주를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선수 영입에도 실패했다. 그 결과 2014년 98승을 거둔 팀은 2년만에 70승도 못하는 팀으로 전락했다. 트라웃이 베이브 루스, 배리 본즈처럼 날뛴다고 해서 2년동안 사라진 30승의 차이를 메꿀 수는 없다. 트라웃 개인에게 팀의 부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이유다.
트라웃의 MVP 자격에 대한 논쟁은 한 선수의 수상 여부로 의미가 국한되지 않는다. 선수 개인의 성적과 능력을 평가하는데 어떤 기록이 가장 객관적인지, 바로 그 척도를 가리기 위한 수많은 논쟁과 연구의 결실이 MVP 투표를 통해 가려질 수 있다. 2001년 스즈키 이치로(42)는 특유의 스타성 덕분에 데뷔 첫 해 아메리칸 리그 신인왕과 MVP를 동시에 수상할 수 있었다. 15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2001년 최고의 활약을 했던 선수는 이치로가 아닌 제이슨 지암비(45)라는 것이 각종 기록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현역 선수 중 통산 WAR이 트라웃보다 높은 선수는 10명 뿐이다. 이 중 가장 어린 선수는 9년 동안 통산 47.7을 기록한 에반 롱고리아(30)다. 그리고 이 중 지난 5년간 가장 높은 WAR을 누적한 선수는 27.8을 기록한 33세의 미겔 카브레라다. 같은 기간 트라웃의 누적 WAR은 46.4였다. 메이저리그에서 단연 압도적인 1위다.
10년 뒤, 5년 동안 리그를 지배한 트라웃이 단 한 번(혹은 2번) 밖에 MVP를 차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게 될까.
박기태(야구공작소)
야구 콘텐트, 리서치, 담론을 나누러 모인 사람들. 야구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공유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