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윤은 권신 동탁을 죽여 한나라 황실을 회복하려한 충신이라고 한다. 그런데 왕윤은 강직하고 지극히 모가 나 독선적인 성격이었다. 공포정치를 실시하지 않았을 뿐이지 조정의 일을 제 맘대로 처리했다는 점에서는 동탁이나 매일반이었다. 그가 오래 집권했더라면 그 역시 황제를 무시하는 권신이 되지 않았을까?
왕윤은 젊은 시절부터 문무를 겸전한 인재로 명성이 높았다. 곽림종이라는 사람은 그를 ‘천리마에 비유할 수 있다. 왕을 보좌할 만한 인물이다’라고 칭찬했다. 일찍이 조정에 출사한 그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에는 예주자사로 재직 중이었다. 난의 진압에 일익을 담당하던 왕윤은 우연히 환관세력의 핵심이었던 장양이 황건적과 내통한 증거를 잡게 되었다. 강직한 성품의 왕윤은 즉시 장양을 탄핵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환관세력의 공적1호가 되었다. 환관들의 중상모략을 당해 여러 차례 투옥되었고 처형당할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환관들의 마수를 피해 변성명하고 강호를 떠돌아다녀야만 했다.
외척인 하진이 집권하고 난 후에야 왕윤은 낙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남윤이 된 왕윤은 이때부터 사례교위 원소와 손잡고 환관세력을 공격하는 일에 앞장을 섰다.
동탁이 처음 집권했을 때 왕윤은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동탁이 주비나 오경 등의 회유에 의해 사대부들을 우대하고 조정 내에서 환관세력을 척결하는 일에 팔을 걷어붙였기 때문이었다. 동탁이 쿠데타를 일으킨 반역자였음에도 그에게 협력한 것을 보면 환관세력에 대한 왕윤의 증오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여느 사대부들과 달리 순순히 협력하는 왕윤을 동탁은 깊이 신뢰했다. 이 덕에 그는 원씨 일가와 황완·양표 등 이름 있는 명문 사대부들이 다 숙청될 때에도 건재할 수 있었다.
동탁은 장안 천도를 밀어붙이면서 그 중책을 왕윤에게 맡겼다. 왕윤이 대신의 풍모를 보이며 이 일을 훌륭히 완수하자 황제와 조정백관들이 다 그에게 의존했다. 이윽고 조정의 중망을 얻게 된 왕윤은 동탁을 제거해 국가를 정상화하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왕윤은 결국 동탁을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동탁의 시비와 눈이 맞은 여포를 충동질해 동탁을 죽이게 한 것이다.
동탁을 죽인 왕윤은 녹상서사가 되어 조정의 대권을 장악했다. 이때 왕윤이 현명하게 후속조치를 했었더라면 한나라 황실의 권위도 쉽게 회복되었을 것이고 천하대란도 조기에 진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윤은 이 중차대한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데 실패했다. 그의 독선적 성격 때문이었다. 그는 우선 대문호 채옹을 동탁의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처형해 사대부들의 원성을 샀다. 량주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군심을 안정시키는 일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황보숭을 배척했다. 이어서 동탁의 사병집단들에 대한 사면을 거부함으로써 서량병들의 반란을 유발했다. 왕윤은 결국 이각·곽사 등 동탁의 잔당들이 이끄는 반란군의 손에 죽음을 당하고 만다. 동탁을 제거한지 불과 40일 만의 일이었다.
일을 도모하기 위해 동탁에게 몸을 숙이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성공 후에는 예의 그 강직하고 악을 미워하는 성품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독선으로 일관했기 때문이었다.
부산역 맞은편 차이나타운의 `삼국지` 벽화. 한나라 말기에 왕윤은 환관들과 정면대결했다.
[영웅의 이면] 왕윤, 환관들과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었다
황건적의 난이 한창일 때 황건적을 격파한 예주자사 왕윤이 적진에서 장양의 빈객이 황건적과 내통한 편지를 얻었다. 왕윤은 관직에 있으면서 아닌 일이 있으면 윗사람에게도 얼굴을 붉히고 대들 정도로 강직한 성품이었다. 게다가 환관들의 횡포를 극도로 미워했으니 그가 장양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증거를 잡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왕윤이 이 사실을 상주하자 영제가 장양을 질책했다. 장양은 영제에게 백배 사죄하고서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왕윤에게 원한을 품은 장양은 다른 일로 사건을 조작해 왕윤을 모함했다. 왕윤은 채포되어 하옥됐다. 때마침 황건적이 다 평정돼 천하에 대사령이 내렸으므로 왕윤은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면 받은 지 열흘도 지나지 않아 다시 다른 죄로 체포령이 내렸다. 평소에 왕윤을 아끼던 사도 양사는 그가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될 것이 걱정돼 아랫사람을 시켜 이를 미리 귀뜸해 주었다.
“그대는 장양의 일로 한 달 안에 두 번이나 처벌받게 되었소. 장양의 간특한 속셈은 헤아릴 수 없으니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나을 것이오.”
어차피 환관들의 마수를 벗어나기 어려우니 차라리 깨끗하게 자결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암시였다. 예주자사 시절 왕윤은 당대의 명사들인 순상과 공융을 치중과 *별가종사로 초청한 바가 있었다. 순상과 공융 등 평소에 왕윤을 따르던 사람들은 양사의 암시에 따라 독약을 마련해 그를 찾아갔다. 이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왕윤에게 결단을 내릴 것을 권유했다. 왕윤이 독약을 물리치며 꾸짖었다.
“신하된 자로서 군주에게 죄를 지었으면, 당연히 엎드려 목 베임을 당해 천하에 사죄해야지 어찌 약을 먹고 죽는단 말인가!”
왕윤은 호기 있게 독배를 던져 버리고 제 발로 함거에 올라탔다. 왕윤이 기백이 사대부들의 용기를 북돋았을까. 그가 다시 투옥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대장군 하진·태위 원외·사도 양사 등 조정 중신들이 다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연명으로 상소해 왕윤을 극력 변호했다.
“공을 세워 상을 줘야 할 사람을 왜 죽이려 하십니까?”
바야흐로 환관과 사족 간의 정면대결 양상이 벌어졌다. 영제가 피하고 싶은 상황이었다. 왕윤은 죽음만은 면하게 됐다. 그 해 겨울 대사령이 내렸지만 왕윤만은 용서를 받지 못했다. 환관들의 집요한 방해공작 때문이었다. 왕윤은 그 다음해에 이르러서야 겨우 석방될 수 있었다.
[거짓말 벗겨보기] 왕윤의 간계에 동탁과 여포가 놀아났다고?
'삼국지연의'에서는 왕윤이 자신의 가기로 있던 절세미녀 초선을 먼저 여포에게 주기로 약속했다가 동탁에게 바치고는 동탁이 강제로 빼앗아 갔다고 속여 여포와 동탁을 이간질했다고 한다. 이른바 미인계를 썼다는 것인데 동탁과 여포가 바보들이 아닌 담에야 겨우 이 같은 속임수에 속아 넘어갔겠는가. 왕윤은 이미 동탁과 틈이 생긴 여포를 포섭해 거사를 일으킨 것이다. 초선은 작가가 창조한 가공인물이지 실재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