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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갓모닝] 120.어느 면장의 공덕비
런던올림픽이 폐막했다. 한국은 역대 최고의 성적인 5위를 했다. 여러 차례 오심 때문에 4년을 고생한 선수들과 온 국민이 울분을 삼키기도 했지만, 이번 올림픽에서 우리는 뜻밖의 종목에서 메달을 땄다. 사격·축구·펜싱의 메달은 새로운 역사를 썼다.
반면 태권도는 금메달 한 개로 종주국의 체면만 겨우 살렸을 뿐이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유도 종주국인 일본은 유도에서 단 한 개의 금메달도 따지 못한 채 쓸쓸히 런던올림픽에서 퇴장했다.
문득 초심이 생각났다. 처음 먹은 마음이 흔들리면 끝이 좋을 수 없다. 1998년 늦가을 일이다. 남해 한 섬으로 역사탐방을 갔던 나는 우연히 한 면장의 공덕비를 발견했다. 당시 나는 대마도해협에서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 장군의 건승비의 흔적을 찾고 있던 중 어떤 비석을 발견했다. 꼼꼼히 읽는데, 하필 H씨 아버님의 공덕비였던 것이다. 비석에는 면장의 행적이 세세히 적혀있었다.
‘학교를 만들어 어린 아이들의 눈을 뜨게 해주고, 춘궁기 때는 어려운 이웃을 도왔으며, 많은 인사들과 교우를 나누며 도민을 위해 솔선수범하셨습니다.’ 비석은 아주 소박했다.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데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뜻밖에 공덕비 주인공의 아들인 H씨였다. “마침 당신 아버님 공덕비를 읽고 있었습니다.” 내 말에 그는 놀라 “언제 남쪽까지 가신 겁니까? 또 어떻게 우리 아버님 공덕비를 찾으셨습니까?” 나도 그도 소름이 끼쳐 대화를 잇지 못했다.
H씨는 방송국에서 잘 나가는 간부였다가 정권이 바뀌면서 일선에서 소외 된 직책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 이전부터 나와 인연이 있었다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버님 공덕비를 읽는 순간 아들에게 전화가 걸려오는 건 영능력자인 내가 봐도 보통 사건은 아니었다.
나는 전화로 그를 위로했다. “공덕비를 읽어보니 아버님에 대한 평가가 대단하십니다. 지금은 비록 한직에 있지만 아버님의 공덕으로 틀림없이 잘 되실 테니 두고 보십시오.” 그 말에 H씨는 힘을 얻었다며 고마워했다.
H씨는 형제 중 장남은 아니지만 총명하고 영특해 아버지의 큰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유독 아버지를 닮은 그는 평소 겸손하고 소박하며 조용한 성품으로 흠 잡힐 만한 부분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변방으로 밀려난 H씨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나는 늘 그를 ‘H사장’이라고 불렀다. 그때마다 H씨는 기분 좋게 웃으며 장난스럽게 “그런 날이 올까요?”하고 되묻곤 했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그는 내 말대로 ‘사장’이 됐다. 이후 나는 ‘요인기피증’으로 그에게 일부러 연락하진 않지만 그는 섭섭하다며 종종 안부를 물어온다. 나는 그를 만날 때마다 아버님의 정신인 ‘겸손’을 강조했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H씨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짓고 막걸리를 나눠마셨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중요인사가 되면 초심과 겸손을 잃기 쉽다. 얼마 전 한 유력인사와 만나는 자리에 나의 지인을 동석한 적이 있었다. 유력인사는 내 지인을 보자마자 자신에게 묻지도 않고 사람을 동석시켰다며 불같이 화를 냈다. 지인은 몸 둘 바를 모르다 조용히 현장을 떠났다. 언제적 벼슬이라고 벼슬만하면 사람을 가려야하는지 씁쓸하다.
벼슬처럼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자리는 없다. 내가 벼슬 안한 게 천만 다행이란 생각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인사를 만났지만 초심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은 드물었다. 남해 한 섬에 소박하게 서 있는 H씨 아버지의 공덕비를 회상하며 지금까지 H씨를 잘 지켜주고 있는 것은 아버지가 남긴 겸손과 소박, 초심의 미덕이란 생각이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