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이 땅에 ‘바보회라는 모임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몇 달 전들었다. 바보가 주인공인 소설 몇 편을 쓴 이후 세상 바보들의 대변인 격으로 치부되던 나로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물론 이 '바보회'는 1969년 서울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이 모여 만든 역사적인 '바보회'와는 별개의 모임으로 1980년대에 결성되었다고 했다.
바보회는 물론 바보들로 구성되었는데 회원이 되려면 누구라도 인정할 만한 바보짓을 했어야만 하며, 그 바보짓을 다른 회원들 앞에서 고백하고 심사를 거쳐야 한다. 기존 회원들이 모두 바보짓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웬만한 바보짓으로는 심사를 통과하기가 쉽지 않다고도 했다.
그러던 차 어떤 문학 관련 행사에 갔다가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바로 그 바보회를 대표하는 회장으로 지목된 S시인과 마주 앉게 되었다. S시인의 곁에는 그의 몇 년 후배인 소설가 H선생도 있었다. 밥이 나오기 전에 나는 온달과 원효를 비롯한 역사적인 바보, 역사에 나타나지 않으나 세상을 그런대로 살만한 것으로 만들어온 배달민족의 바보 전통을 맥맥히 이어가고 있는 바보회의 존재에 대해 물어보았다.
하지만 S시인은 그런 모임은 들어본 적조차 없다고 간단히 부인했다. 워낙 단호하게 말을 자르는 바람에 더 이상 물어볼 말도 없어 냄비에 든 두부찌개가 끓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주최 측이 주문한 지역의 특산 막걸리가 나왔다. 좌중에서 가장 연장자인 S시인은 내가 막걸리를 따르자 왼손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리면서 "난 술 못 마셔. 보름 전에 집에 들어가다가는 살짝 넘어졌는데 이게 금이 갔다고 해서 말야. 깁스까지 했다고" 라고 말했다. "아 형님, 그래서 그동안 그렇게 연락이 안 됐던 거요?" H선생이 물었다.
S시인은 특유의 장난기 서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맞아. 내가 이거 부러지고 난 뒤에 어두워지기만 하면 전화기를 꺼놨어. 누가 술 마시러 오라고 연락할까봐서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S시인은 깁스를 한 새끼손가락으로 나와 H선생 앞의 종이잔에 들어 있는 막걸리를 휘휘 저어주었다. 막걸리 젓는 데는 깁스한 새끼손가락이 아주 제격이라고. 그때부터 좌중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술 먹고 뼈 부러진 사건으로는 아무개 시인이 최고지. 걔는 술을 엄청 처마시다가 사라졌는데 나중에 찾아보니까 개골창에 처박혀서 자고 있더라고. 힘들게 꺼내놓고 봤더니 다리가 부러져 있더라는 거야. 아프지도 않았나."
“술 마시고 부러지면 아픈 줄 모릅니다. 제가 교통사고 당해 봐서 압니다.” 나도 거들었다.
“사실은 나도 술 마시고 부러진 거여.” S시인이 고백했다.
"부러져 보니까 알겄어. 왼손 새끼손가락이라는 게 있으나마나 한 거라고 생각한 게 얼마나 엉터리였나. 이 쓰잘데 없어 보이는 새끼손가락도 부러지면 엄청나게 중요해져. 사람 전체를 요 새끼손가락 하나가 아주 들었다 놨다 한다니까. 그런께 뭐 몸 한 구석 어느 하나라도 온전히 탈없이 잘 있다는 게 얼마나 몸뚱아리 주인한테 큰 일을 해주는 건지 모른다니까. 정신도 마찬가지여."
약간의 감동과 함께 뭔가 깨달음이 오려 했다. 이런 것이야말로 바보의 철학 같은 게 아닐까. 다시 고개를 들고 바보회에 대해 물으려는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H선생이 나 대신 나서 주었다. "형님, 지금 술 드시고 뼈 부러진 게 처음은 아니잖소."
H선생의 말에 S시인은 도리질을 했다. "그게 뭔 소리여, 시방. 이 사람이 공연한 소릴 헐려고 허네."
나는 급히 끼어들며 소리쳤다. "잠깐만요, 잠깐. 지금 말씀하신 그게 뭔가요. 뭐죠?"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소설가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만큼 기승전결과 플롯·복선·필연성이 두루 갖춰져 있었다. 그들은 한때 잘못된 세상을 올바로 바꾸어 보겠다는 꿈을 꾸었다. 완고한 권력의 벽에 부딪혀 그들의 행동과 외침은 언제나 무위로 돌아갔고, 개개인의 삶은 고단해졌으며, 가는 곳마다 감시의 눈길이 뒤따랐다.
그렇지만 그들 대부분은 예술가였으니, 어려움 속에서도 언제나 재미있게 살고 재미있게 놀고 싶어 했다. 그러던 차 어느 봄날, 수십 명의 사람들이 어울려 한강 상류 어느 풍광 좋은 곳으로 소풍을 갔다. 낮부터 술잔이 돌았고, 거나해진 사람들은 누가 시키기도 전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한창 분위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S시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때 형님이 맨날 부르던 노래가 하나 있었거든. 그게 말야. 후렴이 당가다당당 당가다다당 하는 노랜데."
약간은 성적인 맥락이 섞인 속요였다. 반복되는 단순한 가락에 그때그때 바뀌는 가사였는데 이를테면 "키스해 주세요, 앞이빨이 쑥 빠지도록" 하고 나서 "당가다당당 당가다다당" 하고 후렴을 부르는 식이다. 누구보다도 절절한 서정시를 쓸 줄 아는 시인이 그런 노래를 부르는 게 훨씬 더 반향이 큰 법이다.
S시인이 노래를 부르겠다고 앞으로 나섰지만 누구도 주목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S시인은 남들이 모두 바라볼 수 있는 강변의 둑 위에 올라섰다. 키가 큰 편이 아니었지만 그 정도면 모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했다. 그는 목청을 가다듬은 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동작도 함께. '키스해 주세요' 할 때는 입술을 내밀고 '앞이빨이 쑥 빠지도록' 할 때는 이가 빠지고 없는 사람 흉내를 냈다.
'당가다당당 당가다다당' 하고 후렴을 외칠 때는 기타를 치는 주자처럼 옆구리를 훑어 내렸다. 이어서 "껴안아주세요,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하고 노래하며 두 팔로 상대의 갈비뼈를 으스러뜨릴 듯 안는 흉내를 내던 S시인의 모습이 갑자기 강둑에서 사라져 버렸다. 술에 취한 데다 과도한 동작으로 뒤로 벌러덩 넘어지면서 아래로 굴러내렸기 때문이다. 놀라서 달려간 사람들 앞에 S시인은 강둑 아래 풀밭에 기절한 채 누워 있었다.
"형님!" "선생님!" 허겁지겁 강둑 아래로 달려내려간 사람들은 S시인을 안아 일으켰다.
그때 정말 S시인이 불렀던 노래의 가사처럼 갈비뼈 몇 개가 으스러졌다는 것이었다. 폭소가 터질 수밖에 없었다. 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돌아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을 정도였다.
"역시 선생님께선 바보회의 회장이 되실 자격이 충분하십니다. 당대에 누가 선생님을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진심으로 경의를 표했다. 쑥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던 S시인은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바보회는 없다니까. 바보회가 없는데 회장은 무슨 회장이야." "정말 바보회가 없었던 거예요?" 내가 못내 아쉬워하며 묻자 H선생이 대신 대답했다.
"바보회는 없었지만 그 비슷한 모임은 있었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을 한 번 보고 뜸을 들이던 H선생은 먼산을 바라보고 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뱉었다.
"푼수들끼리 모인 푼수회라고." 나는 복분자술 먹은 사람 앞의 요강처럼 또한번 뒤집어지고 말았다.
바보회든 푼수회든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똑똑하고 힘있고 말 잘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 그들 탓에 스트레스 받고 피곤한 삶 속에서 그 모임의 존재 의의는 충분하다. 오랜만에 크게 소리내어 웃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는 증명됐다.
성석제는 시인 출신으로 소설에 뛰어들어 ‘이야기꾼’이란 별명을 얻었다. 1990년대부터 토속적 정감과 위트가 섞인 글로 ‘소풍’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쾌활냇가의 명랑한 곗날’ 등 다양한 소설과 에세이로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최근에는 음식 관련 에세이집들을 펴내며 음식과 사람에 대한 탐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