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파 데 구즈만 올리바레스 공작, 이 초상화 주인공의 이름이다. 전통적으로 말을 탄 초상화는 권력을 상징하는데 이 그림에서 올리바레스 공작은 앞발을 든 말 위에 능숙하게 올라앉은 기승자로 그려졌다. 이는 그가 유능한 통치자임을 암시한다. '올리바레스 공작의 기마상'을 그린 벨라스케스는 말의 둔부와 꼬리털에 흐르는 윤기까지도 세심하게 그려내고 있는데 이것 또한 통치자의 말로서 정성들여 손질된 흔적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공작이 든 지휘봉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면 저 멀리 포화가 이는 것이 보인다. 어떤 전쟁에서의 승리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군의 최고 지휘자로서 그의 성공을 암시하는 풍경이다.
올리바레스 공작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로얄 패밀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전통에 따라 가문을 이을 형과 달리 사제의 길로 들어섰지만 예기치 않은 형의 죽음으로 그는 가문을 잇고 정계로 진출해야 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됐다. 젊은 올리바레스 공작은 이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스페인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한 야심 찬 귀족이었다. 그의 전략은 차기 왕권자인 어린 펠리페 4세의 신임을 얻는 것이었고 그 노력은 성공으로 돌아왔다. 1621년 16세의 펠리페 4세가 왕위에 오르고 그의 신임을 얻은 올리바레스 공작은 스페인을 실제로 통치하는 최고 권력자가 됐다. 3m가 넘는 크기의 올리바레스 공작의 기마상은 벨라스케스가 그린 어떤 초상화보다도 크다.
심지어 왕인 펠리페 4세를 그린 초상화보다도 크다. 이처럼 인상적인 크기의 초상화는 아마도 주인공의 과시욕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위축되어 가던 스페인의 권세를 되찾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고 개혁정치를 펼쳤다. 초기의 성과도 있었지만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하는 바람에 유럽에 대한 패권을 완전히 잃고 만다. 설상가상 내부 반란으로 인해 스페인은 포르투칼 마저 잃게 된다. 또한 공작의 고압적이고 거만한 성격은 그의 지지자들도 반대자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역설적이게도 이 거대한 그림이 그려진 1632~33년에는 올리바레스의 실책이 가중되어 가던 시기였다. 대외 전략의 실패로 인해 스페인의 경제 상황은 점점 더 불안정한 상태가 됐고 프랑스와의 전쟁에 진입하면서 그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있었다. 올리바레스 공작은 벨라스케스를 통해 자신과 스페인이 쇠퇴를 압도하는 무소불능한 권력의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벨라스케스의 손을 통해 탄생한 권력자의 이미지는 거대하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화가의 냉정한 눈은 권력자의 불안감(얼굴·눈)을 놓치지 않고 표현했다는 것이다.
▲양희원 KRA부산·경남경마공원 교관
말을 실질적으로 잘 표현했고 말을 잘 아는 사람이 사진처럼 현실감 있게 그린 그림이다. 과거 유럽에는 말이 많았고 유럽인들에게 말은 현재의 자동차 역할을 했다. 그래서 당시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말의 형태뿐 아니라 습성도 잘 알았다.
그림 속 말은 덩치로만 평가를 할 수 있을 뿐 특별한 특징을 찾기 어렵다. 또 말의 후구만 보이만 보이기 때문에 품종·외모의 특징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말의 크기는 현재의 웜블러드 만큼 크지 않은 작은 체구의 말이다. 기승자와 말의 비율로 평가하면 포니보다 조금 큰 정도다. 포니는 키(지면에서 등성마루)가 150㎝이하인 말을 통칭한다. 말의 체형이 통통한데 이것은 작은 말들의 체형적 특징이다. 셔틀 랜드 포니 한라마 제주마 몽골마 등도 모두 다리가 비교적 짧고 배가 옆으로 나온 것이 특징이다.
박차는 톱니박차를 착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세계적으로 퍼져있는 일반적인 박차다. 참고로 요즘 국내 대회에서는 말 보호를 위해 톱니 혹은 블레이드가 있는 박차를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하고 있다. 그림 속 공작이 사용하고 있는 안장은 당시 사용했던 안정감 있고 편안한 안장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안장들은 스포츠화 된 안장인 반면 17~19세기 유럽이나 몽고의 안장은 장거리를 이동용이라 편의성과 안락함이 강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