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수고대하던 금요일 새벽 3시, 나는 여전히 회사에 있었다. 토요일 점심 때 일어난 나는 잃어버린 금요일 밤을 만회하기 위해 친구와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하기로 했다. 오늘밤 키스할 상대가 없는 두 여인은 입 냄새 걱정도 없이 고기와 함께 나온 양파와 마늘을 잔뜩 먹었다.
쓸쓸한 마음은 혈중 알코올 농도를 높여 채우기로 했다. 한 잔 더 하기 위해 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보드카토닉에 취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어째서 이토록 어려운 일이냐며 볼멘소리만 해댔다. “미국드라마 '섹스앤더시티'를 보면 바에서, 식당에서, 심지어 길에서 만나도 호감을 느끼고 사람들과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데이트를 하잖아. 그런 일은 한국에서는 정령 불가능한 일이야?”
다음날 아침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묶고 화장기 없는 얼굴을 가려줄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오니기리를 사러갔다. 주문을 하다 메뉴판을 떨어뜨렸는데 바에 앉아 있던 남자가 친절하게 주워주셨다. 감사의 인사를 건네려는데 “현정이 아냐?”라고 물었다. 졸업하고 처음 만난 선배였다.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고 우연한 만남을 신기해한 뒤 가게를 나오는데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는구나”하며 친구가 한숨을 내셨다.
메뉴를 고르느라 정신이 없던 나와는 달리 전체적인 상황을 관망하던 친구는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한 남자가 나에게 시선을 주더니 계속해서 쳐다보더라는 것이다. ‘어제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상황은 씻지 않고 음주의 흔적이 남은 이런 날에 찾아올 수 있는 거구나.’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떨어진 메뉴판을 주워주는 모습을 보고 ‘둘만 있을 수 있게 나는 살며시 빠져야겠다’라고 생각하던 찰라 선후배 사이였다는 걸 알게 되어 로맨틱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친구는 현실로 되돌아왔다.
길거리에서 말을 걸어온 상대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길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드라마처럼 로맨틱한 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헌팅을 시도한 남자 중에는 ‘순정남’도 간혹 있을 수 있겠지만, 처음 본 여자에게 거절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안고 용기를 내서 고백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헌팅을 시도하는 대부분 남자들은 사랑을 게임이라고 여기는 부류인 확률이 높다. 그들은 상대의 얼굴이나 외모가 섹스를 하기에 나쁘지 않을 정도, 꼬셨을 때 넘어올 것 같은 여자를 타깃으로 삼는다. 작업을 해서 잘 되지 않더라도 아쉬울 게 없다. 다른 상대로 넘어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달콤하게 들릴 수도 있는 ‘첫 눈에 반했다’는 말은 그 어떤 매력보다 성적인 면이 부각되었다고 보면 된다. 상대방이 가진 외적인 요소가 대퇴부에 자극을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로맨틱한 포장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받아들이고 한 번 자보고 관계를 발전시킬지 말지 결정해보겠다는 태도를 가진 남녀가 만났을 때만이 기대감으로 인한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절반의 호감과 절반의 호기심으로 만나 본 것뿐인데 만남에 응한 것이 섹스를 허락이라도 한 것 마냥 진도를 빼려고 하는 남자들을 상대하는 건 귀찮은 일이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눠보았더니 완전 깨는 상대라 마음이 동하지 않았는데, 행여나 강압적으로 나쁜 일을 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폭력의 본질은 간과한 채 여자의 행실을 비난하기 십상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길거리 만남은 여자입장에서는 손해가 큰 방식일 뿐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길거리 헌팅으로 만난 여자를 잔인하게 살인한 사건도 발생했다. 그런 위험요소들이 존재하는 한, 길거리에서 로맨스가 피어나기는 어렵지 않을까?
현정씨는?
사랑과 섹스에 대한 소녀적인 판타지가 넘치지만 생각 보다는 바람직한 섹스를 즐기는 20대 후반의 여성이다. 블로그 '생각보다 바람직한 현정씨'desirable-h.tistory.com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