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호와 함께 출연한 신일성의 데뷔작 '로맨스 빠빠'(1960). 신성일은 신상옥 감독의 지시로 '로맨스 빠빠' 대본을 김희창 작가에게 받아왔다. IS포토 고백한다. 나의 야망은 또래 젊은이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5081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신필름 전속 신인 배우로 선발된 다음날부터 출근한 나는 매달 5만환의 월급을 받았다. 화폐 개혁(1962년 6월 10일) 전인 1959년, 월급 5만환은 엄청난 돈이었다. 당시 기업이나 공장 같은 것도 없었는데 대한민국에서 거의 유일한 기업인 유한양행의 과장급 월급이었다. 신상옥 감독은 방황하던 젊은이였던 내게 최고 대우를 해주었다. 후일담이지만 앙드레 김도 내게 기적이 일어난 날, 신필름 신인 배우 오디션에 지망했다가 탈락했다고 한다.
당장 대한민국 최고의 부촌인 가회동에 하숙집을 잡았다. 깨끗한 한옥집에서 2만 5000환을 내고 독방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 월급의 반이나 들었지만 아깝지 않았다. 다른 젊은이라면 5만환의 월급을 알뜰살뜰 모아서 훗날을 도모하고자 했겠지만 난 달랐다. 스스로를 최고로 대접해야 진짜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싼 방값은 자존심에 대한 투자였다.
가회동은 전통적으로 양반·나인·상궁 등이 모여사는 곳이었다. 집안이 망하기 전까지 나 역시 대구 한옥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부촌과 한옥의 분위기를 알았다. 가회동엔 종로 화신백화점 박흥식 사장·육영수 여사의 오빠 육지수 지리학 박사·대한양회 이정림 회장·김활란 박사 등이 살았다.
아마 나는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의 주인공 쥘리엥처럼 야심찬 인물이었던 것 같다. 이 소설에서 적(赤)은 군인을, 흑(黑)은 성직자를 상징한다. 이 작품의 제목은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배경이 없는 사람이 출세하는 길은 적 또는 흑 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야심만만한 청년 쥘리엥은 출세를 위해 적의 길을 선택한다. 난 이빨 물고 가회동 생활을 꾸려갔다.
우선 인맥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 중심은 59년 8월 내 소속사가 된 신필름이었다. '춘희' '이 생명 다하도록' 등을 연속으로 히트시키며 흥행 가도를 달리던 신 감독이 1960년 첫 작품으로 준비하던 영화가 '로맨스 빠빠'였다. 신필름 입사 후 얼마 안됐을 무렵, 신 감독은 김희창 작가에게서 '로맨스 빠빠' 대본을 받아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아마 신 감독은 나를 '로맨스 빠빠'의 막내 아들로 출연시킬 심산이었던 것 같다.
김희창 작가가 누구인가? 당시에는 라디오 드라마가 최고의 인기를 끌었고, 라디오 드라마 작가들의 주가가 높았다. 일본 VOA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한 그는 라디오 드라마 '로맨스 빠빠' 등을 히트시킨 인기 작가로 신필름의 각색 작가로도 활동했다. 김 작가의 집은 세검정에 있었다. 김 작가의 부인이 차 대접을 하는 게 그렇게 정갈할 수 없었다. 인정이 그리웠기에 그 집에서 차 한 잔 대접받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또 심부름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런 식으로 당대 최고의 라디오 드라마 작가 한운사와도 인연을 맺었다. 김 작가와 한 동네에 살고 있던 한운사는 '빨간 마후라' '남과북' '현해탄은 말 없다' 등으로 최고의 작가로 꼽혔다. 잦은 심부름을 통해 그와도 인연을 맺었다. 최고 작가들에게 존재를 알리는 것보다 더한 지름길이 어디 있는가?
신필름 사무실에는 6대 신문사 영화 담당 기자들이 출입했다. 회사로 걸려오는 전화를 마땅히 받을 사람도 없었고, 있더라도 귀찮아했다. 내 생각은 달랐다. 전화를 독점하다시피하며 기자들의 목소리를 익혔다. 영화에 대한 전문적 식견과 최고의 정보력을 갖춘 그들이었다. '적과 흑'의 주인공처럼 야심만만했던 난 초년 시절부터 곁에 든든한 우군을 둔 셈이었다.
정리=장상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