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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셰익스피어 극단, 셰익스피어 39편 전작품 도전
"피 위에 세워진 토대는 약하고, 타인의 죽음으로 얻어진 생명 또한 안전치 못하지!"
전쟁도 지고, 귀족들에게 배반당하고, 시민들까지 등을 돌려 외톨이가 된 비운의 영국왕 존왕이 셰익스피어의 연극 '존왕'에서 죽음을 앞두고 던진 단말마다. 셰익스피어의 또 다른 작품 '맥베드'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다음달 2일부터 11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국내 초연을 앞두고 있다.
'존왕'은 지난 2002년부터 셰익스피어 39편 전작품 공연을 출사표로 창단한 유라시아 셰익스피어 극단(이하 ESTC)의 9번째 작품이다.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하는 산악인들처럼 셰익스피어의 39작품에 도전하며 대장정을 펼치고 있는 ESTC를 만났다.
1년에 3작품씩 해도 13년 걸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연극계에선 히말라야 산맥은 최고봉이다. 연극 배우라면 누구든 피할 수 없는 무대다. 그러나 국내 셰익스피어 공연은 4대 비극('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드')과 4대 희극('베니스의 상인' '말괄량이 길들이기' '한여름밤의 꿈' '뜻대로 하세요') 등 인기작을 중심으로 선보이고 있다.
ESTC의 셰익스피어 전작품 도전은 한마디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다. 셰익스피어의 39편 전작품을 1년에 3작품씩 공연한다고 해도 13년이 걸린다. ESTC도 2002년 첫 발을 뗐지만 두 번째 작품을 올린 건 무려 5년이 지난 2007년이었다. 출연 배우의 수도 많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수익 내기도 어렵다. 계획대로 일년에 세 작품 올리기도 버겁다. 제작자나 배우들이나 서로 희생을 감수하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는 무대다.
이번 '존왕'을 포함한 9작품 모두가 국내 초연이라는 점도 ESTC의 자부심이다. '베로나의 두 신사' '헨리 4세(1·2부)' '헨리 5세' 등이었다. 10번째 작품으로 준비 중인 '아테네의 타이먼'(8월 예술의전당 공연 예정)도 국내 초연작이다.
ESTC의 남육현 대표는 "정극 부흥을 위해 셰익스피어를 선택했다. 일본에서도 셰익스피어 전작품 공연이 이루어진 적이 있다"면서 "셰익스피어 전작품 공연은 연극 인프라 조성·노하우 축적·배우 양성에 있어 주춧돌이 된다. 국내 기업들이 스폰서로 나서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더 이상 비극적일 수 없는 존왕
'존왕'은 1215년 현대 민주주의의 초석이 마그나카르타(권리장전)에 서명한 영국왕 존왕의 삶을 그린다. 셰익스피어 초기 작품인만큼 격정적이면서도 언어 유희가 많고, 100% 운문으로 되어 서정성도 강하다. 단종을 죽인 수양대군처럼 조카 아더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존왕은 정통성을 얻지 못하고 결국 독살 당한다. 귀족과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고, 교황과도 대립각을 세운 결과다. 마그나카르타도 귀족의 힘에 굴복해 어쩔 수 없이 서명한다. 레이디 맥베드라도 곁을 지켜준 맥베드보다 더 비참하다.
'존왕' 공연에 좋은 배우들이 모여들었다. 노현희·곽수정·송문수·노준섭 등 젊은 연기자들과 장희진·이성용·김춘기·김춘기 등 중견 배우들이 앙상블을 이룬다. 그 가운데서도 ESTC 부대표 겸 '존왕'의 주인공 이성용은 셰익스피어와 특별히 인연이 깊다. 1975년 셰익스피어의 연극 '맥베드'로 데뷔한 그는 '리어왕' '줄리어스 시저' '헨리 4세' '헨리5' 등의 주인공을 맡아왔다. 그는 "'존왕'에는 권력욕·배신과 음모 등이 녹아있다"면서 "수 백년 전 작품이지만 우리 현실에 반추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그래서 셰익스피어는 위대하다"고 밝혔다.
장상용 기자 [enise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