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됐다는 말이 있다. 2006 월드시리즈 MVP에 선정된 유격수 데이비드 엑스타인(31·세인트루이스)가 바로 그렇다.
도저히 메이저리그에서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은 엑스타인은 2006 가을잔치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굴곡 많은 엑스타인의 성공기를 엿봤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갈 확률
엑스타인을 조명할 때 대부분의 기사들은 LA 에인절스에서 쫓겨난 선수가 설움을 딛고 MVP가 됐다는 내용을 초점으로 다룬다. 그런데 엑스타인과 관련된 다른 뒷이야기를 접하고 나면 그에 대한 존경심마저 생기게 한다. 그는 결코 메이저리거 가 될 수 없는 열악한 조건의 선수였다.
엑스타인의 키는 17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실제로 한 스카우트는 이런 말을 했다. "엑스타인과 같은 선수는 스카우팅 리포트에서 좋은 평가가 나올 수 없다. 그런데 그가 메이저리거가 됐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놀라울 따름이다." 스카우트들은 투수의 경우 공의 스피드, 타자는 기본적으로 체격과 힘, 그리고 빠르기를 중점적으로 눈여겨 본다. 나쁜 신체 조건을 지닌 엑스타인은 파워와 스피드도 뛰어난 선수가 아니었다.
따라서 엑스타인이 메이저리거가 된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작업과 비슷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월드 시리즈 MVP가 되는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썼다.
▲581번째 선수
나름대로 고교와 대학 시절(플로리다 대학)에 수준급의 야수였던 엑스타인은 무엇보다도 신체 조건이 나빠 1997년 아마추어 드래프트에서 전체 骝번'으로 보스턴 레드삭스에 지명됐다.
58번이 아니라 581번째다. 30개 구단이 돌아가며 한 사람씩 지명해도 보스턴이 그를 지명하기 앞서 19바퀴가 돌았다는 뜻이다.
낙담하지는 않았다. 엑스타인은 마이너리그에서 2루수로 뛰며 성장했다. 1998년 하이 싱글A에서 3할6리의 타율을 기록했고 1999년 더블A에서는 3할1푼3리를 기록했다.
그러나 2000년 레드삭스 산하 트리플A 포터킷에서 뛰던 중 웨이버 공시(방출)되는 아픔을 겪었다. 체격과 힘에 지나치게 무게 중심을 둔 당시 보스턴 스카우팅 시스템의 편견(?)이 빚어낸 결과였다.
▲엑스타인의 반란
애너하임(현 LA) 에인절스가 거저줍다시피 그를 데려왔다. 결과적으로 에인절스는 '흙속의 진주'를 발견한 셈이었다. 2001년부터 에인절스의 주전이 된 엑스타인은 공·수에서 팀에서 없어선 안될 선수로 거듭났고, 2002년에는 에인절스가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2002년 에인절스의 톱타자 겸 유격수로 뛴 엑스타인은 152경기에 출전해 2할9푼3리의 타율에 8홈런 8개·63타점·21도루를 기록했다. 홈런 8개 중 3개는 그랜드슬램이었다.
2002년 4월27일과 29일 2경기 연속 만루홈런을 때려내 야구 전문가들과 스카우트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성공의 열쇠는 근성
2루수에서 유격수로 전향한 것에도 사연이 있다. 엑스타인은 2001년 스프링캠프에서 주전 2루수 애덤 케네디가 부상을 당해 백업으로 빅리그 출전 기회를 잡았다.
개막 9경기를 치른 후 케네디가 복귀했고, 엑스타인은 다시 벤치 멤버가 될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마이크 소시아 감독은 엑스타인의 몸을 아끼지 않는 플레이가 팀 동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높이 사 2루수였던 그를 유격수로 돌렸다.
소시아 감독은 "사실 그는 유격수가 될만한 어깨와 수비 범위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완수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엑스타인은 큰 형과 두 여자 동생이 신장병으로 인해 투석의 힘을 빌려 사는 모습을 보면서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지 않게 됐다"고 고백한 바 있다. 최근 그의 부친마저 신장 이식 수술을 받았고 조카도 신장에 문제가 발생해 신장병은 가족력이 됐다 .
가족의 고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근성'이 절로 생긴 것이다. 엑스타인은 자신도 언젠가는 신장병에 걸릴 수 있기 때문에 매순간 열정을 쏟아 붓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다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한다고 한다.
일간스포츠USA=박병기 기자
정리=장윤호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