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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通)-김홍신의 세상] 학교폭력, 정치인 돈 봉투…모두 ‘양아치’의 허세
노인 한 명 죽는 것이 도서관 한 개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면 젊은이 한 명이 죽는 것은 깃대종 하나가 사라지는 것만큼 큰 손실이다. 깃대종(Flagship species)은 특정지역의 생태계를 대표할 수 있는 동물이나 식물을 지칭한다. 젊은이 한 명의 잠재력과 가능성은 천하를 뒤흔들거나 세상을 바꿀 수 있기에 그 소중함은 깃대종과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폭력으로 깃대종 같은 아이들이 자살하거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도 하소연할 데가 없는 세상이 되었다. 가해학생들의 가정환경이나 치기어린 성격, 교육당국의 무능과 교사들의 무관심 탓으로 돌리는 모습을 보면서 가진 자와 쥔 자들의 *편향확증(confirmation)에 분노가 들끓는다. 뇌물상납, 돈 봉투 사건, 전관예우 따위의 부정부패는 강자의 강탈행위와 다름없다. 자신의 직위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는 자들은 거개가 약자시절에 강자에게 아부하고 뇌물을 바쳐 직위를 얻었고 그것에 대한 보상욕구를 충족하려는 것이다. 학교폭력의 가해학생들도 열등감에 대한 보상심리로 약한 자를 괴롭혀 자신의 힘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은 욕구를 충족하려는 것이다. 우리사회가 가진 자와 쥔 자들에게 관대하고 빼앗긴 자와 소외된 자들에게 인색하다는 걸 그들은 선험적으로 알고 있는 셈이다. 뇌물에 현혹되거나 돈 봉투에 눈독 들이는 자들은 자신의 직급이나 지위에 대해 '갑'이라고 허세를 부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뇌물을 바치거나 굽신거리는 자들을 '을'로 취급하고 당당히 대접 받아야 한다는 비뚤어진 우월감에 빠져들게 된다. 이른바 학교폭력의 가해학생들도 기성세대의 풍조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정말 잘난 학생들은 폭력을 쓰지 않는다. 잘나지 못한 학생들이 잘난 척 하려니까 콤플렉스에 빠지고 힘없는 학생들을 괴롭혀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는 것이다. 잘난 짓을 해서 잘난 행세를 해야 하는데 그게 어려우니까 잘난 척이라도 하려고 약자를 상대로 폭력을 쓰는 것이다. 명예·권력·돈을 인간의 3대 욕구라고 한다. 그중에 하나만 얻어도 많이 가진 것인데 사람들은 세 가지를 모두 갖고 싶어 안달을 한다. 3대 욕구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면 명예, 당장 선택하라면 돈, '폼'나게 살 수 있는 것을 선택하라면 대뜸 권력을 택한다. 그런데 권력을 가진 자들이 돈과 명예까지 갖고 싶은 지나친 욕심 때문에 망신을 당하는 경우가 흔하다. 학생들도 기성세대의 3대 욕구와 비슷한 욕구가 있기 마련이다. 공부 잘해서 명예를 얻고 자랑할 만한 부유한 환경과 돈, 거기다 힘자랑을 해서 폼 잡으며 권력을 누리고 싶어 한다. 학교폭력의 주범들이나 부정부패를 일삼는 정치인이나 유력인사들은 건달도 못되는 거지를 더 얕잡아 부르는 ‘양아치’와 다를 게 없다. 정말 힘세고 주먹에 일가견이 있는 학생들은 힘없는 학생들을 건들지 않는다. 강자가 할 짓이 아닐 뿐 더러 약자를 손찌검하는 비겁자가 될 수 없다는 자존심 때문이다. 그러나 ‘우월콤플렉스’에 빠진 학생들은 약자에게 힘자랑을 해서 자신이 열등하지 않다는 걸 애써 강조하려고 안달하곤 한다. 부정부패의 기회를 노리는 정치인을 비롯한 유력인사들은 큰돈을 노리는 게 아니라 양아치 마냥 사방을 기웃거리며 이익이 된다싶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기 마련이다. 우리나라 정치판의 돈 봉투 거래는 상식이자 일용할 양식이 되어버렸다. 세계 주요언론은 한나라당 돈 봉투 사건을 관행이라고 힐난했다. 나라망신을 자초 한 그들과 동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참으로 부끄럽다. '정치계절'이 되니 산지사방에서 정치인들이 출판기념회라는 이름으로 편법 정치자금을 챙긴다. 본인이 직접 쓴 게 아니라 거개가 남이 써 준 걸 가지고 저술까지 한 인물로 평가받기까지 한다. 요즘 같은 불황기에는 책이 1만권만 팔려도 베스트셀러가 된다고 한다. 1만권이 팔리면 저자가 받는 인세가 1천만 원 정도일 뿐이다. 그런데 정치인들의 책이 서점에서 도대체 몇 권이나 팔리겠는가. 출판기념회에서 거둬 챙긴 액수는 각기 다르겠지만 아무리 적어도 1억 원대요. 능력 있는 정치인은 수억 원을 호가한다는 게 정설이다. 이번 돈 봉투 사건의 300만 원 정도는 정치판에서는 통칭 '껌 값'이라고 한다. 국회의원 한명을 회유하는 데 300만 원쯤이라면 참새가 웃을 일이다. 정치판에서 그 정도의 액수는 심부름 시키고 수고했다고 던져주는 행하(팁)정도이다. 호들갑을 떨만한 액수도 아니다. 처음으로 알려진 것도 아니다. 공돈으로 여기며 둘러앉아 나눠먹던 소소한 액수이다. 자랑 같아서 말하기 거북하지만 필자가 1996년 제 15대 국회의원이 되자 복무기간이 48개월인데 세비를 49번 받게 된다는 걸 알았다. 5월 30일에 국회의원 임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5월 30일과 31일 이틀을 걸어 한달치 세비를 주는 것이었다. 국민의 돈을 함부로 쓰는 것을 막기 위해 '세비수령거부운동'을 전개하고 '국회의원세비에관한법률안'을 제출했다. 이틀치만 받자는 것이었는데 필자를 힐난하고 비아냥거리는 국회의원들을 보면서 어찌 양아치를 연상하지 않았겠는가. 15대 국회 4년간 거들떠보지도 않던 법률을 16대에 또 제출해서 겨우 통과시켜 지금은 복무기간만 세비를 지급하는 '일할계산'을 한다. 국회의원이 되자 봉투를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겼다. 정중히 거절하고 돌려보냈는데, 며칠 후에 다시 찾아와 한눈에도 더 두툼해진 봉투를 내밀었다. "언론에 공개하고 고발할 테니 두고 가든가 가져가든가 선택하라"고 했더니 마지못해 봉투를 가져갔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 봉투를 가져오는 즉시 공개하고 고발하겠다고 공시한 뒤 의원실을 개방하여 보좌관들과 함께 사용했다. 보좌관들과 같이 있는 공간에서 설마 봉투를 내밀겠는가 싶었다. 그런데 봉투를 내미는 사람 입장에서는 절묘한 수법을 동원하는 재주가 있기 마련이었다. 방문객을 배웅하고 돌아오면 책상 위 서류뭉치 틈이나 다이어리 사이에 흰 봉투가 귀신처럼 숨어있지 않는가. 보좌관을 시켜 추격전을 벌여 되돌려 주면 '섭하다'는 전화가 오곤 했다. 더러는 동료 국회의원을 통해 돈 봉투가 전달되기도 한다. 기름값이 들더라도 보좌관더러 직접 당사자에게 가서 전달하게 하며 한 번 더 봉투를 가져오면 고발하겠다고 통보했다. 필자처럼 모난 짓을 해도 끊임없이 돈 봉투를 전달하려는 시도를 하는데, 척척 받아먹는 정치인이나 은근히 손을 벌리는 유력인사들에게 어찌 봉투가 남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시 한 번 강조해서 일러두고 싶다. 정치인을 비롯한 유력인사들은 직위를 얻는 순간 "돈 봉투와 청탁을 거절한다. 봉투와 청탁은 즉시 공개하고 고발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속으로 "그러려면 미쳤다고 악을 쓰고 그런 좋은 자리를 차지했겠느냐"고 비아냥댈지도 모른다. 물론 들키지 않는 자가 대다수이고 들켜서 망신당하는 자는 아주 소수이겠지만 그들에게 김구 선생께서 애송하던 서산대사의 시를 들려주고 싶다.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발걸음 하나도 어지러이 말라 지금 내가 걸어가는 발자취는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물신숭배자의 속물근성은 늘 비정하고 그들의 비인간성은 천박한 인격장애를 파생시키기 마련이다. 학교폭력이나 왕따를 근본적으로 치유하려면 부패와 비리의 사슬을 제거하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용어설명 *편향확증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을 말한다. 김홍신은?1981년 소설 ‘인간시장’에서 주인공 장총찬을 내세워 대한민국의 권력층·사회 비리 등을 통렬하게 고발했다. 제15·16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2006년 8년에 걸쳐 집필한 역사소설 ‘대발해’로 완숙한 문학세계를 구축했다. 현재 건국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2.02.06 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