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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종이에 담긴 야구 역사, 손으로 쓰던 수기 기록지가 사라졌다

"1990년대에는 2군(퓨처스리그) 경기가 끝나면 근처 공중전화로 달려가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전화 걸기에 바빴다. 이닝별 스코어는 물론 1번 타자부터 9번 타자까지 성적을 일일이 불러줬다. 1군은 수기 기록지를 팩스로 전송했는데, 여건이 안 좋으면 공중전화로 달려가야 했다. 통화 시간이 길어서 뒤에 기다리던 사람들 눈총도 많이 받았다."1991년 2월 입사해 지난해까지 1군 3376경기, 2군 385경기 기록지를 작성한 이종훈 KBO 기록위원장이 떠올린 추억이다. 이젠 전화로 기록을 불러주거나 팩스나 사진으로 수기 기록지를 전송할 일은 없다. 올해부터 1군에선 공식적으로 수기 기록지가 사라지고, 전산 기록지만 운영하고 있다.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다. A4 용지보다 조금 더 큰 종이 안에 기록된 숫자와 기호를 통해 경기 중 벌어진 모든 상황을 표기할 수 있다. KBO는 1982년 출범 후 수기 기록지만 작성하다가 1990년대부터 전산 기록지를 도입했다. 지난해까지 수기와 전산 기록지 작성을 병행하다가 올해는 1군에서 수기 기록지를 작성하지 않고 있다. 안타와 실책 등에 관한 '판단'은 여전히 기록원이 내리지만, 공식 기록지는 전산 시스템만 이용하는 셈이다.종전에는 두 명의 기록원 가운데 한 명은 수기, 나머지 한 명은 전산 기록을 담당했다. 그러나 올해부터 피치 클록이 시범운영됨에 따라 한 명은 전산 기록지, 나머지 한 명은 피치 클록에 관여한다. 이종훈 기록위원장은 "처음에는 기록원 한 명이 수기 기록과 피치 클록을 병행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는데 상당히 힘들더라. 기록원은 타구, 수비 위치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안타와 실책을 판단한다. 그런데 두 가지를 병행하면 피치 클록 체크를 놓치거나, 기록 판단에 영향을 끼친다"라고 말했다. 박근찬 KBO 사무총장은 "피치클록 역시 야구를 잘 알아야 한다. 공식 업무이므로 기록원을 활용한다"고 밝혔다. 1군에서 수기 기록지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기록 강습회를 수강한 보조 요원을 채용, 공식 기록원과 함께 경기를 관전하며 비공식적으로 수기 기록지를 작성하고 모은다. 이종훈 위원장은 "수기 기록지는 오류 시 수정 테이프로 지우면 된다. 그러나 전산 기록은 다르다. 예를 들어 7회 경기가 진행 중인 상황에 5회 초 A 투수의 투구 수를 하나 빠트렸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잘못된 기록으로 되돌아가 수정하고, 이후 상황을 다시 입력해야 한다"고 전했다. 이때 수기 기록지가 필요하다. 또한 전산 시스템이 다운되면 실시간으로 기록하거나 데이터를 제공하지 못하는 단점을 보완하는 데 수기 기록지가 활용된다. 반면 전산 기록지는 기록을 입력하는 순간 각종 데이터가 자동화돼 실시간으로 팬들에게 기록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다.과거 서울 동대문야구장 관중석에서 기록지 작성법을 독학한 이종훈 이원장은 "수기 기록은 프로야구 출범부터 함께한 한국 야구의 역사 중 하나다. 수기 기록지에는 기록원마다 취향과 색깔이 담겨 있다. 우리는 글자체만 봐도 어느 기록원이 작성했는지 알 수 있다"라고 했다. 수기 기록지가 사라지는 아쉬워하는 기록위원들도 있다. 이종훈 위원장은 "경기 종료 후 집이나 숙소에서 수기 기록지를 작성하는 게 어떻냐는 의견도 있었다. 반면 현장을 떠나 기록하는 게 무슨 의미냐는 말도 나왔다"고 전했다.수기 기록지가 사라지는 동안에도 기록 자체에 대한 관심은 더 커지고 있다. KBO가 올해 2월 초 개최한 기록강습회는 고작 33초 만에 200명 모집인원이 마감됐다. 역대 최소 시간이었다. 이종훈 위원장은 "기록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뜨겁다. 기록원으로서 뿌듯하다"라며 "기록 현장에서 경기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거나 차가 고장 나서 경기장에 지각하는 꿈을 지금도 꾼다"라며 웃었다. 이형석 기자 2024.06.25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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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의 수다] '라떼'는 그랬지…"동원이와 찍은 사진 없어"

"옛날에는 기자들이랑 전기 리그 끝나고 야유회도 갔지."(선동열 전 국가대표 감독) "그 당시 낮 경기 끝나면 집에서 기자들하고 고스톱도 쳤어."(김시진 전 롯데자이언츠 감독)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있을 때 쟤(선동열 감독) 좀 데려오라고 추천했는데…."(이만수 전 SK 와이번스 감독) 멍석을 깔아주니 이야기보따리가 풀어졌다. 한 시대를 풍미한 프로야구 레전드인 만큼 입담의 무게도 묵직했다. 케케묵은 비하인드 스토리부터 과거엔 민감할 수 있는 '영업 비밀'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일간스포츠 창간 53주년 사진전에서 공감대가 형성된 키워드는 역시 '사진'이었다. 김시진 전 감독은 "다 뺏겨서 없다. 1987년쯤인가, 책을 쓴다고 해서 (출판사에) 사진을 거의 200장 정도 줬던 거 같다. 그걸 돌려받지 못했다"며 "며칠 전 (최)동원이 관련해서 인터뷰했는데 대학생 때 대표팀에 뽑혀 같이 찍은 사진도 없더라. (이만수 전 감독을 가리키며) 당신하고 찍은 사진도 2~3장밖에 없다"고 아쉬워했다. 김시진 전 감독과 이만수 전 감독은 대구상고(현 대구상원고)와 한양대 동문에다 삼성 라이온즈에서 배터리로 호흡을 맞춘 '절친'이다. 서로를 알고 지낸 시간이 꽤 길지만, 학창시절 함께 찍은 사진은 귀하디귀하다. 옆에 있던 선동열 전 감독이 거들었다. 선수 시절 불세출의 스타였던 선 전 감독은 일거수일투족이 스포츠신문 1면을 장식했다. 그와 관련한 사진을 선점하려고 사진 기자들의 경쟁도 불꽃 튀었다. 선동열 전 감독은 "그때만 해도 집에 와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앨범을 보고 '이거 좀 쓰고 돌려주겠다'고 그랬지만 실제 돌려준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어릴 때 사진이 아예 없다"고 푸념했다. 김시진 전 감독은 "사진하면 생각나는 일화가 하나 있다"며 "1978년 이탈리아 세계선수권대회에 나가서 (박)철순이형이 필름 카메라를 하나 샀다. 로마 트레비 분수 앞에서 선글라스 끼고 폼을 잡았다. 지나가던 사람한테 사진을 부탁했는데 빽빽(back back) 외치며, 계속 뒤로 가라고 하더라. 그 순간 카메라를 갖고 도망갔다. 그땐 내가 발도 빨랐는데 그를 잡지 못했다"며 웃었다. 취재 환경도 달라졌다. 과거엔 일간스포츠를 비롯한 오프라인 몇몇 매체만 야구를 취재했다. 현장 기자가 적으니 가족 같은 분위기가 유지됐다. 선동열 전 감독은 "전기 리그가 끝나면 후기 리그를 앞두고 브레이크 타임이 있었다. 그때 기자들과 야유회를 가서 각종 고기를 함께 먹었다. 해태의 전통 같은 거였다"고 회상했다. 김시진 전 감독은 "그 당시 (기자라고 하더라도) 나이가 많으면 형처럼 생각하고 같이 어울렸다"며 "부산(롯데)에 있을 때는 와이프한테 전화해서 (기자들과) 집으로 갔다. 거기서 고스톱도 치고 복개천에 나가서 술도 함께 마셨다"고 맞장구를 쳤다. 선동열 전 감독과 김시진 전 감독은 '슬라이더 마스터'라는 공통점이 있다. 김 전 감독은 "선 감독 공을 처음 본 게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에 차출되고 나서다. 그때 선 감독은 고려대를 다닐 때였고, 난 군대 상병이었다. 서울 역삼도 반도유스호스텔에서 합숙했는데 선 감독의 슬라이더를 보고 깜짝 놀랐다"며 "어떻게 슬라이더 추진력이 저렇게 좋을까 싶었다. 타자 앞에서 꺾이는 게 내가 던지는 슬라이더하고 차이가 있었다. 다만 어떻게 던지냐고 물어보진 못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멋쩍게 칭찬을 듣고 있던 선동열 전 감독은 "시진이 형이나 (임)호균이 형을 비롯해 선배들이 던지는 걸 보고 '우리나라 투수가 최고구나' 싶었다. 시진이 형은 투구 폼이 굉장히 간결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커맨드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만수 전 감독은 선동열 전 감독을 향해 "쟤가 왔어야 했다"며 농을 쳤다. 이 전 감독은 1997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쳤다. 이듬해 미국 행을 선택했고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시카고 화이트삭스 불펜 포수와 불펜코치로 활약했다. 이만수 전 감독은 "당시 켄 윌리엄스 화이트삭스 단장과 제리 매뉴얼 감독에게 (선동열) 영입을 추천했다. 선동열 감독은 영리해서 잘할 거 같았다"며 "(그 당시 미국에선) 아시아 야구를 얕보는 게 있었다. 선동열 감독이 (메이저리그를) 통일시켰어야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았다. 조계현, 이강철까지 3명을 추천했는데 모두 내 타율을 깎아 먹은 투수들"이라고 추억했다. 이만수 전 감독은 "미국에서 깜짝 놀란 건 영업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 걸 선수들에게 물어보면 다 알려주더라. 우리와 스타일이 달랐다"고 했다. 이를 듣고 있던 김시진 전 감독은 "우리 땐 올스타전을 3차전까지 했는데 당시 친한 사람들끼리 술을 마시면 그립 같은 영업 비밀을 다 알려줬다. 그래서 올스타가 아니라 '술스타'였다. 이 감독은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아 몰랐을 뿐"이라며 껄껄 웃었다. 일간스포츠와 사연도 깊다. 일간스포츠는 1984년까지 국내 유일의 스포츠 전문지였다. 프로야구가 태생한 1982년에도 유일하게 현장을 지켰다. 선동열 전 감독은 "소년 체전에 나갔던 중학생 때 일간스포츠에 처음 기사가 실렸던 거 같다. (프로에 와서는) 1988년부터인가 일간스포츠가 주관하는 시상식에서 최고투수상을 다섯 번인가 연속으로 받았다. 그때만 해도 다섯 냥짜리 금메달을 부상으로 줬다. 아직도 그걸 갖고 있다. 일간스포츠와 좋은 추억이 많다"고 회상했다. 김시진 전 감독도 뒤지지 않았다. 김 전 감독은 "일간스포츠에 처음 나온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동대문야구장에서 비가 와서 노게임이 선언됐는데 다음 날 선발로 나가서 이겼다. 그때부터 인연이 시작됐다"며 "(은퇴한 뒤에는 일간스포츠 시상식에서) 프로코치상을 두 번인가 세 번 받았다. 난 일간스포츠에 서운한 게 하나도 없다"며 웃었다. 이만수 전 감독도 선수 시절 일간스포츠 시상식과 지면을 수차례 채웠다. 2017년에는 일간스포츠와 조아제약이 공동 제정한 조아제약 프로야구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자비로 자선 재단 헐크파운데이션을 만들고, 야구 불모지 라오스에 야구를 전파하는 산파 역할을 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배중현 기자 bjh1025@edaily.co.kr 2022.09.28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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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리그 40년 The moment] 굿바이 슈퍼스타...삼성 통합 우승으로 끝난 1985년

한국 프로야구가 올해로 출범 40주년을 맞이했다. 1969년 창간한 일간스포츠는 1982년 프로야구 태동을 현장에서 지켜본 국내 유일의 스포츠 전문지다. 강산이 네 번 바뀌는 동안 한해도 빠짐없이 프로야구의 성장과 변화 과정을 기록했다. 이 기간 여러 구단의 희비가 엇갈렸고 수많은 별이 뜨고 졌다. 일간스포츠는 프로야구 원년부터 지난 시즌까지 KBO리그 역사를 사진으로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한다. 1. 서울로 입성한 OB 1982년 대전에서 출발했던 OB는 1985년 서울로 연고지를 옮겼다. 리그 창립 때 약속된 일이었다. OB가 동대문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쓰자 아마추어 야구계의 반발이 거셌다. 한국야구위원회(KBO)와 OB는 홈 55경기 중 43경기를 동대문에서, 나머지 12경기를 잠실과 대전에서 치르겠다고 발표(실제 동대문 37경기, 잠실 9경기, 대전 6경기, 마산 3경기)했다. 2. 김성근 감독의 몰수패 사건 OB는 7월 16일, 프로야구 역사상 두 번째 몰수패를 당했다. 6회 말 5-5 1사 주자 1·3루에서 MBC 1루 주자 박흥식이 2루 도루를 시도하다 런다운에 걸린 사이, 유고웅이 홈을 밟았다. 김성근 OB 감독은 박흥식이 귀루 때 3피트 라인을 벗어났다고 어필했다. 항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선수단을 철수시켰다. 5분 뒤 김 감독에게 퇴장 지시가 내려졌고, 다시 5분 뒤 몰수 경기가 선언됐다. 3. 1062일 만에…불사조 박철순 박철순은 1982년 OB 우승을 이끄는 과정에서 허리 디스크를 앓았다. 이듬해 그라운드에 복귀했지만, MBC전에서 송영운의 타구를 맞고 디스크가 재발했다. 1985년 5월 11일 597일 만에 마운드로 돌아온 그는 8월 20일 청보와의 홈경기에서 6이닝 4피안타 8탈삼진으로 호투했다. 82년 9월 18일 롯데전 이후 1062일 만에 거둔 통산 25번째 승리였다. 4. 18연패 탈출한 삼미 삼미는 1985년 4월, 프로야구 역대 최다인 18연패를 당했다. 3월 30일 개막전에서 승리했으나 이후 한 달 동안 이기지 못했다. 3월 31일 롯데전 3-0 완봉패를 시작으로 18번의 패배가 이어졌다. 삼미는 4월 30일 에이스 최계훈이 홈에서 4-0 완봉승을 거둬 연패에서 탈출했다. 5. 굿바이 슈퍼스타즈 18연패를 끝낸 다음날, 삼미는 70억원에 구단을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인수자는 청보식품이었다. 새 구단의 정식 출범은 후기리그 개막일로 미뤄졌다. 전기리그 최종일(6월 21일) 삼미는 롯데에 16-6으로 대패했지만, 3200여 명의 인천 팬들로부터 열렬한 응원을 받았다. 슈퍼스타라는 이름으로 프로야구 초대 멤버로 활약한 삼미는 3시즌 반 동안 120승 4무 211패(승률 0.364)를 남겼다. 6. 청보 핀토스 출범 6월 29일 청보 핀토스가 출범했다. 핀토스(북아메리카 얼룩말)라는 이름은 아시아승마연맹회장이었던 김정우 구단주가 정한 이름이다. 핀토스는 후기리그 개막 시리즈에서 삼성에 2연패한 후 7월 2일 잠실 경기에서 MBC를 9-1로 대파, 팀이 바뀐 뒤 첫 승리를 따냈다. 7. 김성한, 우승 멤버 제치고 MVP 1985년 최우수선수(MVP)에는 해태 김성한이 뽑혔다. 그해 삼성의 통합 우승을 이끈 장효조(타율, 출루율 1위) 이만수(홈런 공동 1위, 타점 승리타점 1위) 김시진(다승 공동 1위, 승률 공동 1위, 평균자책점 3위)을 모두 제친 이변이었다. 김성한은 22홈런(공동 1위) 133안타(1위) 장타율 0.575(1위) 타율 0.333(3위) 75타점(2위)로 활약했다. 투수로서도 4승 3패 1세이브(10경기 등판)를 기록했다. 8. 삼성 한국시리즈 없이 우승 삼성이 유례없는 전·후기 통합 우승을 달성했다. 프로야구 출범 때부터 막강한 전력을 자랑한 이들은 6월 12일 롯데를 15-3으로 격파하고 승률 0.741로 전기리그 우승을 확정했다. 9월 17일 롯데전에서는 김시진을 앞세워 7-4로 승리, 후기리그 우승까지 차지했다. 삼성은 한국시리즈를 치르지 않고 챔피언에 올랐다. 9. '국보' 이긴 신인왕 이순철 1985년 신인왕은 이순철이었다. 타율 8위(0.340) 홈런(12개)과 타점(50개) 10위, 도루 3위(31개)를 기록했다. 8월 21일부터 9월 27일 동안 20경기 연속 안타를 쳐 이광은이 같은 해 세운 기록(19경기 연속)도 깼다. 이순철이 꺾은 신인 중에는 훗날 '국보 투수'가 된 선동열도 있었다. 차승윤 기자 사진=IS 포토, 한국프로야구 화보, 한국프로야구 30년사 2022.09.0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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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조·헐크·4할 타자·이도류'...KBO, 원년 대표 레전드 4인 발표

'불사조' 박철순이 '헐크' 이만수, '4할 타자' 백인천, '투타겸업' 김성한과 함께 1982년을 대표하는 레전드 올스타에 선정됐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25일 박철순, 이만수, 백인천, 김성한이 KBO리그 40주년 레전드 40인 중 4인으로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KBO는 지난 16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2022 KBO리그 올스타전 현장에서 레전드 40인 중 최다 득표 레전드 4명(선동열, 최동원, 이종범, 이승엽)을 먼저 발표한 바 있다. 이날 발표된 4인은 첫 4인에 뒤이은 최상위 득표자는 아니지만, KBO리그 원년인 1982년, 상징성 있는 기록과 활약으로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선수들이다. 전문가 투표(80%)와 팬 투표(20%) 결과를 합산한 결과, 선정위원회에서 추천한 177명의 후보 가운데, 투표 결과 박철순(OB)이 11위, 이만수(삼성)가 12위, 백인천(MBC)이 24위, 김성한(해태)이 25위에 올랐다. ‘불사조’로 불리는 박철순은 KBO 리그 원년인 1982년 정규시즌 MVP를 차지했다. 밀워키 브루어스와 계약을 맺고 마이너리그에서 뛰었던 그는 승리(24승), 평균자책점(1.84), 승률(0.857) 등 3개 부문에서 1위를 휩쓸었다. 이어 최다 연승(22연승) 부문에서는 40년 동안 깨지지 않은 불멸의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비록 고질적인 허리 부상으로 원년에 화려했던 명성에 비해 은퇴할 때까지 꾸준한 누적 기록을 쌓지 못했음에도 통산 평균자책점 7위, WHIP 공동 18위에 올라 있다. 전문가 투표에서 156명 중 134명(68.72점)에게 표를 받았고, 팬 투표에서는 1,092,432표 중 508,173표(9.30점)로 총 점수 78.02점을 획득, 40명의 레전드 중 11위에 올랐다. ‘헐크’ 이만수는 1982년 3월 27일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MBC와의 KBO 리그 개막전에서 1회에 친 2루타로 KBO 리그 첫 안타와 타점, 5회에는 담장 넘어로 타구를 보내며 KBO 리그 첫 홈런이라는 역사를 썼다. 1983년부터 3년 연속 홈런 1위를 기록했고, 1986시즌과 1991시즌에는 각각 KBO리그 최초로 100홈런과 200홈런을 달성했다. 1983시즌 정규시즌 MVP를 수상했고 1984시즌에는 타율, 홈런, 타점 등 3개 부문을 석권한 KBO 리그 최초 타격 3관왕이 되었다. 이만수 이후 타율, 홈런, 타점 3개 부문 3관왕을 차지한 선수는 롯데 이대호(2006시즌, 2010시즌)가 유일하다. 이만수는 전문가 투표에서 130표(66.67점), 팬 투표에서 529,649표를 받아 총 점수 76.36점으로 12위에 올랐다. 원년 타격왕인 백인천은 당시 타율 0.412를 기록했다. KBO리그 40년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4할 타자이자 유일무이한 감독 겸 선수로도 남아있다. 일본프로야구 출신이었던 그는 당시 지명타자를 맡아 타율, 안타, 득점(공동), 장타율, 출루율 부문 1위를 휩쓸었다. 전문가 투표 107표(54.87점), 팬 투표 303,752표(5.56점), 총 점수 60.43(24위)을 기록했다. 김성한은 홈런 타이틀을 3차례나 차지했을 만큼 KBO 리그 초창기를 지배했던 강타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원년에는 투타를 오가며 활약한 원조 ‘이도류’였다. 타석에서는 타율 0.305(10위)에 97개의 안타(3위), 13개의 홈런(4위)을 기록하며 69타점을 쌓아 올려 최다 타점 타이틀을 차지했다. 마운드에서는 26경기에서 10승(1 완봉승 포함) 5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79의 기록으로 승리 7위, 평균자책점 5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KBO 리그에서 한 시즌에 두 자릿수 승수와 두 자릿수 홈런을 동시에 기록한 선수는 김성한이 유일하다. 김성한은 1989시즌 KBO 리그 최초로 26홈런, 32도루를 기록하며 20-20 클럽에 가입, 리그를 대표하는 호타준족임을 과시하기도 했다. 김성한이 정규시즌 MVP 2회(85,88년), 골든글러브 6회(85~89, 91년)를 차지하며 해태에서 14시즌을 활약하는 동안 해태는 7차례나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한편, 레전드로 선정된 선수들의 시상은 레전드들의 전 소속 구단 홈 경기에서 진행된다. 김성한과 이만수의 시상은 각각 이번 주 26일 광주 NC와 KIA 경기, 30일 대구 롯데와 삼성 경기에서 이루어질 예정이다. 박철순의 시상은 오는 8월 13일 잠실 SSG와 두산 경기에서, 백인천에 대한 시상은 별도로 진행될 예정이다. 차승윤 기자 chasy99@edaily.co.kr 2022.07.25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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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원년 첫 안타, 첫 홈런 '개막전 사나이' 삼성 이만수…"최동원 때문에 타율 많이 까먹어"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삼성 라이온즈에는 스타플레이어가 즐비했다. 1970년대 대구·경북 지역이 경북고-대구상고(현 상원고) 중심으로 아마야구 전성기를 누리면서 유능한 선수들이 꽤 많이 발굴됐다. 그 흐름이 구단으로 연결돼 창단 당시 삼성은 투타 밸런스가 가장 안정적인 팀이었다. 투수 이선희와 권영호, 야수 배대웅, 천보성, 서정환, 정현발 등 선수층이 유독 두꺼웠다. 많은 전문가가 프로야구 원년 우승 후보로 삼성을 점찍었던 이유다. 이만수 전 SK 감독은 '스타 군단' 삼성의 핵심이었다. 실업야구팀에서 온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주전 포수로 활약했다. 1982년 3월 27일 열린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에서도 주전 마스크를 썼다. 당시 삼성은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MBC를 상대했는데 이 전 감독은 1회 초 2루타로 KBO리그 통산 첫 안타의 주인공이 됐다. 이어 5회 초에는 사상 첫 홈런까지 때려내며 프로야구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개막전 사나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활약이었다. 마지막에 웃진 못했다. 삼성은 개막전 초반 5-0으로 크게 앞서 손쉽게 승리를 따내는 듯했다. 그러나 7-4로 앞선 7회 말 유승안에게 동점 스리런 홈런을 맞고 승부가 연장으로 흘렀다. 결국 10회 말 이종도에게 끝내기 만루 홈런을 허용해 무릎을 꿇었다. 만루 홈런을 내준 투수 이선희와 개막전 배터리 호흡을 맞춘 이 전 감독은 "그런 드라마는 글로 쓰려고 해도 쓰기 힘들다"고 회상했다. 원년 첫 경기를 역전패로 마무리한 삼성은 그해 한국시리즈에서도 웃지 못했다. 한 수 아래로 평가받던 OB 베어스에 무릎 꿇었다. 이만수 전 감독은 삼성의 '시작'을 누구보다 잘 기억하고 있는 레전드다. 그는 "겉은 프로지만 돌아가는 내용은 사실 아마추어에 가까웠다"며 1982년을 돌아봤다. -프로야구가 개막한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어땠나."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 메이저리그(MLB)에 진출하는 게 꿈이었다. 그 꿈을 갖고 야구를 계속했는데 우리나라에 프로야구가 생긴다고 해 그 꿈을 접었다. 한양대를 졸업하기 전에 프로야구가 생긴다는 얘길 들었다. 미국에서 야구 경기를 하나 한국에서 하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미국에 가지 않고 남기로 결정했다. 현역 시절에는 일본에 진출할 기회도 있었다. 프로에서 활약하는 걸 보고 제의가 오더라. 지금 생각하면 아쉬움도 물론 있지만 그럴 때마다 어디서 야구를 하든 똑같다고 생각했다." -삼성의 지명을 받았을 때는 어땠나."너무 좋았다. 왜냐면 내가 대구 출신 아닌가. 그때는 고등학교 연고(대구상고 졸업)를 기준으로 프로에 갔으니까 대구가 연고인 삼성에 갈 수밖에 없었다. 프로야구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는데 고향 팀에 가니까 더 좋았다." -프로야구 원년 전지훈련은 어떻게 진행했나."1982년은 거제도에서 했다. 삼성이 운영하는 조선소 안에 야구장이 아닌 축구장이 있었다. 거기서 훈련하다가 마산으로 넘어가고 그랬다. 당시만 하더라도 전지훈련을 하러 해외에 간다는 걸 상상하기 힘들었다. 이후 삼성이 국내 구단 중 처음으로 미국 LA에서 전지훈련을 했지만, 원년은 아니었다. 정말 추워서 죽는 줄 알았다. 정신력으로 버텼는데, 지금이라면 아마 다 도망갔을 거다. (웃음) 환경이 열악했지만 그래도 프로야구가 생긴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개막전 떨리지 않았나."전두환 대통령이 시구하지 않았나. 당시 삼성의 초 공격이어서 MBC 청룡 포수였던 유승안이 시구를 받았던 거 같다. 역사적인 순간이었고 야구인 중 한 명으로서 감사했다. 너무 기뻤다." -개막전에서 역사적인 KBO리그 첫 안타를 때려냈는데."상황이 생생하다. 1회 초 2사 2루에 투수가 이길환이었고 주자는 함학수 선배였다. 풀카운트에서 2루타를 때려내 첫 안타와 첫 타점을 동시에 올렸다. 유종겸 선배를 상대로 친 첫 홈런(5회 초)도 다 기억난다. 당시만 하더라도 첫 안타와 타점, 홈런에 대한 중요성이 크지 않았다. 프로라는 인식이 별로 없었다. 아마추어를 오래 하다 보니까 오랫동안 프로야구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기념이 될 만한 걸 모아놓거나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첫 안타와 첫 홈런, 더 기억에 남는 건."솔직히 홈런이다. 안타도 좋았지만, 홈런을 친 뒤 베이스를 돌 때의 그 기분을 잊을 수 없다. 내가 펄쩍펄쩍 뛰면서 지금은 돌아가신 서영무 감독님을 안고 들어왔던 기억이 난다." -개막전 상대 MBC에는 백인천 감독이 있었는데."고등학교 3학년 때 최연소로 국가대표에 발탁돼 일본 가고시마에 갔었다. 거기에서 백인천 감독과 장훈 선배가 경기하는 걸 직접 봤다. 우상 같았던 선배 중 한 명이 백인천 감독이었다. 프로야구를 하면서 함께 경기한다니까 어땠겠나. 쉽게 말해 백인천 감독은 대학생이고 우리는 초등학생이나 다름없었다. 상상을 해보면 된다. 4할 타율을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실력 차이가 났다. -그 실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활약이 대단했는데."대학교 때 백호기라는 대회가 있었다. 백호기는 대학팀과 실업야구팀이 모두 출전해 함께 경기하는 대회였다. 그때 실업야구는 김우열, 윤동균 선배 등 멤버가 쟁쟁했다. 초창기 대학팀은 실업야구팀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후 대학팀이 우승했는데 내가 대학생(한양대) 때는 결승에 올라가고 그랬다." -원년 개막전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7-7로 맞선 연장 10회 말 이선희 선배가 이종도 선배한테 역전 끝내기 만루 홈런을 맞고 울었던 기억이 가장 많이 난다. 그때 내가 포수였다. (웃음)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프로야구 붐업을 시킨 주역이 이선희 선배와 이종도 선배라고 생각한다. 만약 삼성이 경기 전 예상대로 이겼다면 보는 사람마다 '아, 야구 별거 아니네'라는 생각을 했을 거다. 그런데 끝내기 만루 홈런이 나왔으니 그 짜릿함은 말로 다 표현을 못 하지. 당시에는 개막전이 TV로 중계됐었는데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있었을까. 한 사람은 눈물을 흘렸고 한 사람은 영광의 만루 홈런을 기록했다. 두 선수가 프로야구 흥행을 이끌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드라마는 글로 쓰려고 해도 쓰기 힘들다." -프로야구 원년 가장 인상적이었던 선수."그 당시만 해도 김우열 선배, 윤동균 선배, 김봉연 선배 같이 야구 잘하는 선수가 정말 많았다. 그런데 내가 포수니까 그분들이 타석에 들어서면 일본말로 이런저런 얘길 많이 했다. (웃음) 지금은 프로야구에서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그때는 가능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겉은 프로지만 돌아가는 내용은 사실 아마추어에 가까웠다. 포수 마스크를 쓰고 얼마나 말을 많이 했냐면…그것 때문에 선배들과 많이 다투기도 했다. 백인천 감독은 직접 그라운드에 나와서 '이만수 입 좀 닫게 해달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상대하기 어려웠던 '천적'이 있었나."선동열(해태·1985년 데뷔)은 뒤늦게 들어왔는데, 초창기 최동원(롯데·1983년 데뷔) 때문에 타율을 정말 많이 까먹었다. 최동원만 아니었어도 통산 타율(0.296)이 3할이 됐을 거다. 그다음에는 롯데에 박동희(1990년 데뷔)라고 있었다. 선수 생활하면서 공이 그렇게 빠른 투수는 처음 봤다. 당시 구속이 최고로 빨랐던 투수였다. 그리고 이강철(해태·1989년 데뷔), 조계현(해태·1989년 데뷔) 같은 투수 때문에 타율이 또 많이 떨어졌다. 그 시절 해태에는 정말 좋은 투수가 많았다." -당시 룸메이트는 누구였나."선수 생활하면서 가장 길게 룸메이트를 했던 건 4년 뒤에 입단한 성준(1986년 데뷔)이다. 한 6~7년 정도 했던 거 같다. 원년에도 선배랑 후배가 2명씩 잠을 잤는데 투수랑 포수가 짝을 이뤄 투수였던 이선희 선배랑 했었던 거 같다. 1년 뒤에 김시진이 입단해 그때는 김시진이랑 했다." -프로야구 원년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원년 사령탑이셨던 서영무 감독님이 정말 무서웠다. 성적이 좋지 않으면 화가 나셨는지 고속도로를 가다가 선수들에게 내리라고 하고 그냥 가버리셨다. (웃음) 버스를 저 멀리에 주차하고 선수들을 기다리고 계셨는데 그러면 거기까지 막 뛰어가고 그랬다. 당시에는 그런 일이 정말 많았다." -아쉽게 프로야구 원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놓쳤는데."그때 우승을 하지 못하면서 그 이후 계속 어렵게 됐던 거 같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니 우승하는 데 오랜 시간(삼성·2002년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이 걸렸다." -최근 프로야구에서 눈에 띄는 선수가 있다면."사실 요즘에는 야구를 잘 보지 못했다. 이정후(키움)를 비롯한 젊은 선수들이 잘하더라. 한동민(SK)이 잘했으면 좋겠는데…(웃음)" 배중현 기자 bae.junghyune@joongang.co.kr 관련기사 [창간특집] OB 베어스 윤동균 서른넷 '노장' 원년 KS 진출…'막강 삼성' 박살냈지 2020.09.2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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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OB 베어스 윤동균 서른넷 '노장' 원년 KS 진출…'막강 삼성' 박살냈지

두산그룹은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OB 베어스로 리그에 참여했다. 당초 OB 베어스는 서울 연고를 원했지만, MBC에 밀려 대전 연고로 역사적인 첫발을 내디뎠다. 대전행을 받아들인 조건은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 '3년 후 서울 연고 이전'을 보장받았다. 실제 1985년부터 대전을 떠나 서울로 연고를 옮겼다. 더 중요한 건 선수 구성이었다. MBC의 연고 지역인 서울 출신 선수를 나눠 영입하는 2대1 드래프트를 원년 개막에 앞서 진행했다. 당시에는 출신 고등학교 연고 지역 구단에 입단해야 했는데 대전 지역 고등학교 전력이 약해 서울 팜을 공유했다. MBC가 먼저 2명을 선택하면 1명을 선택하는 방법이었는데 이를 통해 박철순(배명고), 조범현(충암고), 구천서(신일고) 등을 영입할 수 있었다.윤동균(71) 현 일구회 회장도 드래프트에 따라 OB 유니폼을 입었다. 서울 동대문상고를 졸업해 MBC 입단도 가능했지만 불발돼 OB 베어스와 인연이 닿았다. 실업야구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프로야구 원년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1982년 3월 28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MBC와의 구단 역사상 첫 번째 경기에 3번 우익수로 선발 출전해 5회 팀 1호 결승타를 때려냈다. 그해 77경기에 출전해 타율 0.342(284타수 97안타), 8홈런, 47타점을 기록했다. 백인천(MBC·0.412)에 이은 리그 타격 2위. 신경식, 김우열과 함께 중심 타자로 맹타를 휘둘러 OB 베어스를 원년 한국시리즈(KS) 우승으로 이끈 주역이다. -프로야구가 개막한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어땠나."개막보다 프로야구가 생긴다는 게 남달랐다. 당시 내 나이가 서른넷이었다. 서른넷이면 노장 중의 노장이었다. 실업야구 포항제철에서 코치 겸 선수를 하고 있을 때였다. 나이가 많아서 프로를 간다는 게 참 애매했다. 그래도 열심히 하면 가능성이 있을 것 같더라. 운동을 관두지 않고 오래 한 걸 잘했구나 싶었다. 프로에서 뛴다는 게 영광스럽기도 하고 감회가 새로웠다."-프로야구 원년 선수대표로 선서까지 했는데."그걸 6개 구단에서 서로 하려고 했다. (웃음) 다들 하길 원하니 선뜻 결정이 났겠나. 그러다가 6개 구단 대표가 모여 '나이가 가장 많은 선수가 하자'는 의견이 모였다. 당시 나하고 김우열의 나이가 가장 많았는데 내가 1949년 7월생이고 김우열이 9월생이다. 개막전이 열린 곳이 동대문야구장인데 떨리거나 그런 건 없었다. 영광스러울 뿐이었다."-당시 OB가 아닌 MBC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는데.“선수 드래프트 마감 하루 전까지 윤동균과 김우열을 뽑겠다는 구단이 없더라. 서울 연고인 MBC에선 '둘 다 필요 없다'고 영입을 포기했었다. OB에선 김영덕 감독과 김성근, 이광환 코치가 셋이 모여 고심하다가 '이 멤버로 가면 꼴찌다. 늙었어도 영입하면 1, 2년은 충분히 써먹을 수 있지 않냐'는 얘기가 나왔던 거 같다. 특히 이광환 코치가 강력하게 뽑아야 한다고 얘길 했다더라. 아마추어에선 윤동균과 김우열이 수위 타자도 차지하고 소위 날아다녔다. 결과가 어땠나. 프로야구 원년 OB가 우승할 때 윤동균과 김우열이 3, 4번 타순에서 다 했지. (웃음)” -당시 OB의 연고는 대전이었는데."어쩔 수 없었다. 어느 기업이든지 잠실과 지방 중에 택하라면 100이면 100 서울을 선택하지 않겠나. 서로 대전을 안 가려고 하니까 (구단주 회의에서) MBC에 먼저 서울 연고 조건을 준 거고 OB에는 '대전에서 3년을 보내면 서울로 연고를 옮겨주겠다'는 얘기를 한 거다. 그때는 드래프트에서 선수를 학교 연고로 뽑았다. 광주상고나 광주일고를 나왔으면 무조건 해태로 가야 했다. 다만 광주 출신인데 서울에서 학교를 졸업했으면 해태를 못 갔다. 난 동대문상고를 나와 무조건 서울이었다." -원년 전지훈련을 마산에서 보냈는데."말이 전지훈련이지 제대로 된 운동장이 있었겠나. 프로도 아니었지. 당시 마산고나 마산상고 운동장을 빌려 연습했는데 김성근 감독이 마산상고 감독을 오래 하셔서 마산하고 인연이 있었다. 원년에는 전지훈련을 마산에서만 한 40일 정도 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호텔에서 묵지 않고 '한진여관'이라는 곳에서 잠을 잤다. 당시 '한진여관' 사장이 윤상원 KBO 심판위원의 아버지였다. 그때 체중이 94㎏ 정도였는데 10㎏을 빼고 올라왔다. 체중을 줄일 방법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가면 숙소에서 운동장까지 뛰어다녔다. 왕복 5㎞ 정도 거리였는데…나중에 밥 먹을 때 수저들 힘이 없더라. (웃음) 그렇게 체중 조절을 했으니 개막전 때 얼마나 몸이 가벼웠겠나."-박용곤 구단주의 야구 사랑도 대단했는데."구단 창단 후에 당시 박용곤 구단주가 선수단 미팅을 하는데 '우리가 삼성을 이길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말하더라. 그런 뒤 '여러분들이 삼성에 이길 건 하나밖에 없다. 그게 바로 야구입니다. 저는 사람 좋은 것보다 야구 잘하는 사람을 원합니다'라고 강조하셨다. 구단 창단해서 선수단에 처음 한 말이었는 데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원년에 유독 삼미(16전 전승)에 강한 이유가 있었나."삼미가 워낙 약했다. 당시 야구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OB를 삼미 다음으로 꼽았다. 삼미가 꼴찌 후보였고 'OB는 잘해야 5등 한다'는 얘길 많이 들었다. 다른 구단 이기기 힘들 거라고 하더라. 그런데 우승을 했으니 얼마나 큰 이변이었나. 그때 멤버가 꽤 탄탄했다. 1번 타순에 구천서와 양세종이 번갈아가면서 들어갔고 3번은 내가 쳤다. 4번은 김우열, 5번은 김유동과 신경식, 하위 타순을 이홍범·이근식·유지훤이 맡았다. 포수는 조범현과 김경문이었다. 개막하기 전까지 다른 팀에서 신경식이나 구천서 같은 선수를 몰랐을 거다. 두 선수는 실업야구 상업은행에서 뛴 경력이 있어서 난 실력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 정도 멤버면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특히 OB는 타선이 강했는데."백인천(당시 MBC) 감독이 규정타석을 채워 타격왕(0.412)에 올랐지만, 타격 10걸에 OB 선수(4명)가 꽤 있었다. 내가 백인천 감독과 경쟁하다가 마지막에 밀려 2위(0.342)였다. 신경식(0.334), 김우열(0.310), 구천서(0.308)까지 쟁쟁했다. 타격보다 투수가 약했다. 투수진이 은근히 괜찮았지만, 유명한 투수가 부족했다. 삼성과 비교하는 게 어려웠다. 우린 박철순 하나였는데 삼성은 그때 황규봉·권영호·이선희까지 국가대표 투수가 즐비했다. 그런 삼성을 우리가 한국시리즈에서 박살 냈다. (웃음)" -당시 룸메이트는 누구였나."내 룸메이트는 나이가 가장 어린 김진홍이었다. 그때는 고참과 막내가 함께 썼는데 김우열은 항상 김광수를 데리고 다녔다. 같은 선린상고 출신이라는 게 이유였다." -프로야구 원년 가장 인상적이었던 선수는."역시 백인천 감독이라고 볼 수 있다. 굉장히 인상 깊었다. 일본에서 프로생활을 했다는 걸 야구장에서 실감할 정도였다. '일본 프로야구 벽이 높구나'하는 생각도 들더라. 일본에는 잘하는 선수가 더 많지 않았겠나. 한국에 와서 이 정도 활약하니까 일본 야구 수준을 가늠할 수 있었다." -상대하기 어려웠던 '천적'이 있었나."삼성의 이선희 투수였다. 왼손 투수인데 유독 이선희만 만나면 힘들었다. 아무래도 잘 던지기도 했고 결과적으로도 많이 약했다." -프로야구 원년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당연히 한국시리즈 우승 아니겠나. 1차전을 대전에서 하고 2차전을 대구에서 하는 일정이었다. 3차전부터 7차전까지는 모두 서울에서 하는 데 대전 첫 경기가 무승부(현장 15회 3-3)였다. 2차전은 대구에서 완전 박살(0-9)이 났다. 콜드게임으로 끝나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삼성에는 어렵다는 걸 실감했다. 2차전을 크게 지고 난 뒤 부담을 안고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당시 박용민 단장이 '내일 아침에 서울 가면 무조건 숙소생활이다'고 하더라. 당시에는 경기 끝나면 술을 자주 먹던 시절인데 단체로 묶어놓을 생각이었던 거 같다. 그런데 이광환 코치가 '안 됩니다, 합숙시키면 안 되고 풀어줘야 한다'고 얘길 했다. 그렇게 해서 대구에서 단체로 술을 먹고 서울로 올라왔는데 숙소도 들어가지 않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 (웃음)" -분위기가 확 달라졌나."3차전부터 4연승을 해 우승한 거 아닌가. 7차전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대구에서 술을 먹으면서 패한 걸 다 잊고 서울에 올라온 게 컸던 거 같다. 이광환 코치는 당시에 지면 관두겠다며 사표를 들고 다녔다고 하더라. 서울에 오자마자 4연승을 했으니 기적 아닌가. OB는 당시 우승을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했으니 난리가 났다."-개막전 때 부정배트 논란도 있었는데."그때 방망이는 내가 봐도 어느 정도는 알루미늄배트로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박용민 단장이 기자 생활도 오래 하면서 일본 특파원을 했었다. 야구를 좋아하니까 일본에서 배트를 수입했는데 아마 사용 정지된 배트를 사 온 게 아닌가 싶다. 선수들은 구단에서 나눠준 배트를 썼다. 포항제철에선 알루미늄 배트를 쓰다가 프로에 오면서 나무 배트를 썼다. 당시엔 압축배트나 이런 거에 대한 지식이 없던 시절이다." -좀 더 빨리 프로야구가 출범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없었나."프로야구를 한다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도 못했던 시절이다. 프로야구 출범할 때 포항제철 박태준 회장의 공이 크다는 얘길 많이 들었다. 그분이 야구를 참 좋아해 노력도 많이 했다더라." -최근 프로야구에서 눈에 띄는 선수가 있다면."종범이 아들(키움 이정후)이다. 대단한 선수더라. 아비보다 낫다고 본다. (웃음) 이종범은 체격이 크진 않지만 야무지게 생겼는데 이종범 아들은 어떻게 보면 약해 보일 수 있더라. 그런데 1년 사이에 몸도 더 좋아진 거 같고 요즘엔 홈런도 잘 치지 않나. ‘야구천재’라고 본다. 팀 공헌도는 다른 선수들보다 더 좋은 거 같다. 발 빠르고 타격 잘하고 수비도 좋고 뭐 하나 아쉬운 게 있나. 이젠 파워까지 겸비했다. 이정후에게 도전할 만한 타자는 강백호(KT)인데 둘을 놓고 감독으로서 선택하라면 이정후다.“-일간스포츠에 대한 추억이 있나."1983년인가 일간스포츠에 가서 한국시리즈 해설도 하고 관전평도 쓰고 그랬다. 당시 한국시리즈(해태-MBC)가 광주에서 열렸는데 현역 선수다 보니까 광주를 못 가고 일간스포츠에서 TV 켜놓고 경기를 봤던 기억이 있다." 배중현 기자 bae.junghyune@joongang.co.kr 2020.09.21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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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들이 몰려온다, 대통령배 고교야구 오늘 개막

제54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중앙일보·일간스포츠·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주최)가 13~22일 서울 목동야구장, 신월야구장에서 열린다. 32개 팀이 토너먼트 방식으로 우승팀을 가린다.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고교야구대회도 6월에야 시작했다. 대회 개최는 물론 팀들의 훈련도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로 인해 전력 차가 크지 않아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가장 눈에 띄는 팀은 강릉고다. 지난해 청룡기와 봉황대기 준우승으로 파란을 일으켰고, 올해도 상승세다. 주말리그 강원·경기권역 후반기 리그에서 5승1패로 2위였고, 황금사자기에서 준우승했다. 주목할 선수는 좌완 에이스 김진욱(18)이다. 올해 6경기에 나와 3승1패, 평균자책점 2.25다. 탈삼진이 41개로, 경기당 7개다. 강릉고는 13일 오전 9시30분 신월구장에서 순천효천고와 첫 대결 한다. 황금사자기 4강팀 광주진흥고와 청룡기 준우승팀 광주동성고도 우승 후보다. 광주진흥고는 2012년 이후 8년 만에 세 번째 우승, 광주동성고는 2005년에 첫 우승 이후 15년 만에 두 번째 우승에 도전한다. 광주진흥고는 투타 조직력이 돋보인다. 광주동성고 우완 에이스 김영현(18)은 올해 11경기에서 3승, 평균자책점 2.61이다. 광주진흥고는 13일 목동구장에서 경남고와, 광주동성고는 14일 신월구장에서 마산용마고와 각각 격돌한다. 이번 대회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무관중으로 진행한다. 1967년 4월 25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시작한 대통령배는 매년 땀과 눈물이 뒤섞인 명승부를 연출하며 한국 야구를 책임질 예비 스타의 등용문 역할을 해왔다. 박소영 기자 psy0914@joongang.co.kr 2020.08.13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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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번째 페이지를 넘기는 역사와 전통의 대통령배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가 막을 올린다. 13일 개막하는 제54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는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고교야구의 심장이다. 1967년 4월 25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제1회 대회는 박정희 대통령이 시구하며 전국적인 관심 속에 첫발을 내디뎠다. 매년 땀과 눈물이 뒤섞인 명승부를 연출하며 한국프로야구를 책임질 예비 스타들의 등용문으로 자리 잡았다. 초대 대회 챔피언은 서영무 감독이 이끈 경북고였다. 당시 결승에서 한 수 위로 평가받던 선린상고를 3-0으로 꺾었다. 외야수 조창수, 유격수 강문길이 이끈 타선의 짜임새에 '불세출 투수' 임신근의 활약이 더해졌다. 1969년 3회 대회 우승에 실패한 경북고는 1970년부터 3연패를 달성했고 1974년 8회 대회에서 또 한 번 우승을 차지했다. 통산 6회 우승은 광주일과, 부산고와 함께 역대 타이이다. 경북고의 독주가 끝난 뒤에는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 1975년 9회 대회에선 광주일고 김윤환이 투수 성낙수가 버틴 '거함' 경북고와 결승에서 고교야구 역사상 첫 3연타석 홈런을 때려내며 팀 우승과 MVP를 모두 손에 넣었다. 이후 군산상고(1976)·공주고(1977)·부산고(1978)·선린상고(1979)까지 매년 대회 우승팀이 바뀌며 혼전이 거듭됐다. 1980년 14회 대회에선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이 이끈 광주일고가 결승에서 광주상고를 꺾고 역대 두 번째 우승에 성공했다. 대통령배의 명성은 2000년대에도 이어졌다. 1999~2000년에는 부산고를 연속 우승으로 이끌며 추신수(현 텍사스)가 2년 연속 MVP를 수상했다. 2001년 35회 대회에선 고교 특급 투수 김진우가 이끈 진흥고가 성남서고를 제압하고 첫 우승의 기쁨을 맛봤다. 진흥고는 2012년 46회 대회에서 하영민(현 키움)을 앞세워 창단 두 번째 대통령배 트로피를 가져갔다. 2017년 51회 대회에선 강백호(현 KT)가 괴물 같은 활약을 펼치며 서울고의 역대 네 번째 우승을 이끌었다. 2008~09년에는 덕수고, 2018년과 지난 시즌엔 대구고가 2연패를 달성했다. 대회를 통해 배출된 스타도 셀 수 없이 많다. 초대 대회 MVP를 차지한 경북고 왼손 투수 임신근은 1968년 2회 대회에서도 MVP에 오르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1976년 10회 대회는 대구상고 배터리가 야구팬을 열광시켰다. 투수 김시진과 포수 이만수가 그 주인공. 두 선수는 군산상고와 결승전에서 웃지 못했다. 9회 수비에서 김시진은 김종윤에게 3루타를 맞았고, 이어진 상황에서 스퀴즈 번트를 의식해 볼을 뺐지만 이만수가 잡지 못하며 결승점을 내줬다. 눈물의 경험을 쌓은 김시진은 프로에서 통산 124승을 거두며 에이스 계보에 이름을 올렸고, 이만수는 프로 1호 홈런을 치며 역사의 순간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현역 선수 중에서 대통령배 출신 최고 스타는 메이저리거 추신수(현 텍사스)다. 1999년 33회, 2000년 34회 대회 부산고 2연패를 이끌었다. 투수로 활약했지만, 미국 무대 진출 뒤에는 타자로 성공했다. 2020시즌을 끝으로 은퇴하는 KBO리그 통산 최다 안타 기록 보유자 박용택(LG)은 1996년 30회 대회에서 휘문고의 우승을 이끌며 MVP가 됐다. 현재 LG 선발 투수 임찬규와 NC 주전 2루수 박민우는 2010년 44회 대회 휘문고 우승을 이끌었다. 2017년 51회 대회는 강백호(KT)가 서울고를 우승으로 이끌며 MVP가 됐다. 그는 2018시즌 KBO리그 신인상을 받았다. 과연 올해 대통령배에선 어떤 스토리가 쓰일까. 많은 이들의 관심 속에 54번째 페이지가 열린다. 배중현 기자 bae.junghyune@joongang.co.kr 2020.08.12 06:00
야구

한국야구 115년 역사, 지하에서 잠잔다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의 학고재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미리 보는 한국야구박물관’ 전시회를 찾았다. 열혈 야구팬들은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갤러리를 방문해 프로야구·아마추어·국가대표 등과 관련된 기념품 총 192점을 찬찬히 둘러봤다. 이날 전시회를 찾은 야구팬 표재윤(27)씨는 “유치원 때부터 야구를 좋아했다. 한국의 야구박물관 개관을 오랫동안 기다렸다. 그러다 이번에 전시회를 한다는 기사를 보고 한달음에 달려왔다”면서 “미국이나 일본 야구박물관에 비하면 아직 걸음마 수준이지만, 이렇게라도 한국 야구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것은 매우 뜻깊다”고 말했다. 지난 12일 시작된 이번 전시회는 24일까지만 열린다. 야구박물관 개관이 계속 늦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우중건(39) 학고재 부사장이 야구팬들을 위해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요청해 12일간 관련 물품을 전시하기로 했다. 우중건 부사장은 “나도 야구공을 모으는 야구팬이다. 박물관 개관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계속 미뤄진다길래 일부 물품이라도 소개하고 싶어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1904년 한국에 야구가 도입된 이후 115년 세월이 흘렀지만, 국내에 공식 야구박물관은 아직 없다. 1998년 이광환(71) 전 LG 트윈스 감독이 제주도에 문을 연 야구박물관은 이 감독의 개인 소장품 위주다. 한국 야구의 모든 것을 집대성하는 박물관을 만들기 위해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는 2011년부터 야구 관련 자료와 물품을 본격적으로 수집했다. 이듬해부터 KBO가 가세해 10만 점 모으기를 목표로 야구박물관 자료수집위원회를 만들었다. 부산시 기장군과 2014년 야구박물관 건립 협약을 맺은 덕분에 이르면 2016년에 완공될 것으로 보였다. 기장군이 부지를 제공하고 부산시가 100억 원가량의 건설비를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첫 삽을 뜨지도 못한 채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어느새 야구박물관 건립은 8년째 표류 중이다. 문제는 연간 20억원에 달하는 운영비다. 2015년 부산시가 운영비까지 감당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KBO가 운영비를 떠맡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러자 KBO는 지난해 신사업 팀을 만들어 박물관 규모 등을 재조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최근 조직 개편으로 신사업 팀은 사라지고, 야구박물관 업무는 클린베이스볼 팀으로 넘어갔다. 하지헌 KBO 홍보팀 과장은 “야구박물관 건립은 계속 추진되고 있다”면서 “그런데 언제 완공될지 미정이라서 일단 올해 안에 사이버 야구박물관을 먼저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서울 강남구 도곡동 야구회관 지하 1층에 있는 아카이브 센터에는 유니폼과 야구공 등 약 5만 점의 한국 야구 관련 물품이 쌓여있다. KBO리그 원년 구단이었던 삼미 슈퍼스타즈, MBC 청룡의 유니폼과 국보 투수 선동열, 철완 고(故) 최동원 등 전설적인 선수들의 유니폼 등이 지하에서 잠자고 있다.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이승엽이 개인 통산 400홈런을 기록할 당시 착용했던 유니폼과 지금은 사라진 동대문야구장의 홈플레이트도 있다. 홍순일(80) 전 야구박물관 자료수집위원장은 “2016년 개관 예정이었던 야구박물관이 계속 미뤄지더니 2017년에는 수집위원회마저 해산됐다”면서 “선동열·이승엽 등 전설적인 선수들을 설득해 물품을 수집했다. 다들 아쉬워하면서도 야구박물관에 전시되는 것이 더욱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 기꺼이 귀중한 물품을 내놨다. 그런데 아직도 박물관에서 야구 관련 물품을 보지 못하니 우스갯소리로 ‘사기당한 것 아니냐’고 한다”고 전했다.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과 박물관은 1939년에 건립됐다. 일본 야구 전당 박물관은 1959년에 생겼다. 메이저리그 소속 토론토 블루제이스를 제외하곤 프로야구팀이 없는 캐나다도 1983년 야구 명예의 전당과 박물관을 개관했다. 그런데 국내에선 아직 박물관 건립을 여전히 검토만 하고 있다. 야구박물관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부산시가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수도권 지자체에서 관심을 보이고 있다. 홍순일 전 위원장은 “야구계 원로들 사이에선 ‘이러다가 박물관 건립이 좌초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이 강하다. 그래서 직접 부지를 찾으러 다니고 있다. 건설비를 지원해주겠다는 기업도 찾았다”면서 “박물관 옆에 야구장과 부대시설 등을 같이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이런 방법으로 수익을 창출한다면 무료 관람도 가능하다는 계산이다. 그렇다면 많은 야구팬들이 찾아올 것”이라고 했다.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과 박물관 「 - 자선사업가 스티븐 칼튼 클락이 1939년 미국 뉴욕주 쿠퍼스타운에 건립. - 미국 야구 관련 사진 25만 장·물품 4만 점 등 전시. - 매년 약 35만 명 방문. 지난해 방문객 1700만 명 돌파. - 입장료 성인 25달러, 12세 이하 15달러. 」 ■ 일본 야구 전당 박물관 「 - 일본 아마추어·프로야구 협력으로 1959년 고라쿠엔구장에 건립. 1988년 도쿄돔으로 이전. - 일본 야구 관련 물품 4만 점, 관련 도서 5만 점 소장. - 매년 약 9만 명 방문. 2010년 방문객 500만 명 돌파. - 입장료 성인 700엔, 고등·대학생 400엔, 초등·중학생 200엔 」 온라인 일간스포츠 2019.02.21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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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갓모닝] 731. 장충단공원의 가을

1958년 9월 가을이었다. 그해 봄 서울로 전학 간 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는 학교에 가기가 싫어졌다. 아침에 도시락을 싸서 학교가 아닌 근방 장충단공원으로 향했다. 당시 장충단공원에는 작은 폭포와 개울이 있었다.공주 금강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모습을 지켜본 나로선 사람은 왜 태어나는지, 내가 존재하는 까닭은 무엇인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에 대한 물음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비록 초등학교 학생이었지만 정신적으로 꽤 성숙했다.그렇게 3, 4일이 지났을까. 학교는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곳이 됐다. 학업을 계속할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어머니께 죄송했지만 학교를 그만 둘 참이었다. 그날도 아침에 학교를 간다며 집을 나섰다. 가방에는 여전히 도시락이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도시락을 먹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내가 자주 찾는 장충단공원은 지금은 장충체육관과 신라호텔이 들어선 쪽이었다. 항상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벤치를 찾아갔는데, 담임 선생님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길진아!” H선생님이었다. 학교에 계셔야 할 H선생님이 나를 만나기 위해 장충단공원에서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었다. 당시 한 학급은 70~80명의 학생들로 북적였던 시절인데 학생 하나가 학교에 며칠 안 나온다고 장충단공원까지 찾아오시다니.H선생님은 나를 보자마자 “네 마음, 아픈 것은 안다. 하지만 학교는 다녀야 한다. 야단은 치지 않을 테니 내일부터 학교에 꼭 나오거라. 학교는 졸업해야 하지 않겠니?” 그 순간 뜨거운 사제의 정을 느끼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친구들이 네가 장충단공원을 배회한다고 얘기해서 일부러 와 본 거야. 그런데 공원에 있으니까 학교에 가기 싫어지는데?(웃음)” H선생님은 내 어깨를 토닥이시고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셨다.다음 날부터 나는 다시 학교에 갔다. 가고 싶어서 간 것은 아니었다. H선생님의 감사한 마음 때문이었다. 이듬해 초등학교 근처에 동대문야구장이 생겼다. 처음 야구장을 구경하러 갔다가 수세식 화장실에 놀라고 말았다. 화장실 변기에 달린 줄을 당기니 갑자기 물이 자동으로 시원하게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그 화장실이 신기해 몇 번이나 구경을 갔는지 모른다.그렇게 야구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나는 중학교에 들어가자 경동고등학교 야구팀 팬이 되었다. 1960년 청룡기, 황금사자기, 화랑기까지 석권했던 경동고등학교의 간판선수는 타격왕 백인천 선수였지만, 나는 3루수 오춘삼 선수가 더 좋았다.오춘삼 선수는 팬들에게 잘 대해 줬다. 중학생들에게도 뭔가를 더 챙겨 주고 싶어 했다. “너 이거 가질래?”라면서 당시엔 꽤 값이 나갔던 야구공을 사인까지 해 주며 내게 주었다. 그런 모습 때문에 더욱 오춘삼 선수를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됐던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은 동대문야구장과 경동고등학교 야구팀 그리고 오춘삼 선수 덕분에 무사히 이겨 낼 수 있었다.9월이 되면 장충단공원에서 나를 기다려 주셨던 H선생님과 경동고등학교 오춘삼 선수가 떠오른다. 60년이 흐른 지금, 내가 자주 갔던 장충단공원과 동대문야구장은 많이 변해 추억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시절 내 마음속을 가득 차오르게 했던 두 사람을 향한 그리움은 지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 2018.09.1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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