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그룹은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OB 베어스로 리그에 참여했다. 당초 OB 베어스는 서울 연고를 원했지만, MBC에 밀려 대전 연고로 역사적인 첫발을 내디뎠다. 대전행을 받아들인 조건은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 '3년 후 서울 연고 이전'을 보장받았다. 실제 1985년부터 대전을 떠나 서울로 연고를 옮겼다. 더 중요한 건 선수 구성이었다. MBC의 연고 지역인 서울 출신 선수를 나눠 영입하는 2대1 드래프트를 원년 개막에 앞서 진행했다. 당시에는 출신 고등학교 연고 지역 구단에 입단해야 했는데 대전 지역 고등학교 전력이 약해 서울 팜을 공유했다. MBC가 먼저 2명을 선택하면 1명을 선택하는 방법이었는데 이를 통해 박철순(배명고), 조범현(충암고), 구천서(신일고) 등을 영입할 수 있었다.
윤동균(71) 현 일구회 회장도 드래프트에 따라 OB 유니폼을 입었다. 서울 동대문상고를 졸업해 MBC 입단도 가능했지만 불발돼 OB 베어스와 인연이 닿았다. 실업야구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프로야구 원년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1982년 3월 28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MBC와의 구단 역사상 첫 번째 경기에 3번 우익수로 선발 출전해 5회 팀 1호 결승타를 때려냈다. 그해 77경기에 출전해 타율 0.342(284타수 97안타), 8홈런, 47타점을 기록했다. 백인천(MBC·0.412)에 이은 리그 타격 2위. 신경식, 김우열과 함께 중심 타자로 맹타를 휘둘러 OB 베어스를 원년 한국시리즈(KS) 우승으로 이끈 주역이다.
-프로야구가 개막한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어땠나. "개막보다 프로야구가 생긴다는 게 남달랐다. 당시 내 나이가 서른넷이었다. 서른넷이면 노장 중의 노장이었다. 실업야구 포항제철에서 코치 겸 선수를 하고 있을 때였다. 나이가 많아서 프로를 간다는 게 참 애매했다. 그래도 열심히 하면 가능성이 있을 것 같더라. 운동을 관두지 않고 오래 한 걸 잘했구나 싶었다. 프로에서 뛴다는 게 영광스럽기도 하고 감회가 새로웠다."
-프로야구 원년 선수대표로 선서까지 했는데. "그걸 6개 구단에서 서로 하려고 했다. (웃음) 다들 하길 원하니 선뜻 결정이 났겠나. 그러다가 6개 구단 대표가 모여 '나이가 가장 많은 선수가 하자'는 의견이 모였다. 당시 나하고 김우열의 나이가 가장 많았는데 내가 1949년 7월생이고 김우열이 9월생이다. 개막전이 열린 곳이 동대문야구장인데 떨리거나 그런 건 없었다. 영광스러울 뿐이었다."
-당시 OB가 아닌 MBC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는데. “선수 드래프트 마감 하루 전까지 윤동균과 김우열을 뽑겠다는 구단이 없더라. 서울 연고인 MBC에선 '둘 다 필요 없다'고 영입을 포기했었다. OB에선 김영덕 감독과 김성근, 이광환 코치가 셋이 모여 고심하다가 '이 멤버로 가면 꼴찌다. 늙었어도 영입하면 1, 2년은 충분히 써먹을 수 있지 않냐'는 얘기가 나왔던 거 같다. 특히 이광환 코치가 강력하게 뽑아야 한다고 얘길 했다더라. 아마추어에선 윤동균과 김우열이 수위 타자도 차지하고 소위 날아다녔다. 결과가 어땠나. 프로야구 원년 OB가 우승할 때 윤동균과 김우열이 3, 4번 타순에서 다 했지. (웃음)”
-당시 OB의 연고는 대전이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 어느 기업이든지 잠실과 지방 중에 택하라면 100이면 100 서울을 선택하지 않겠나. 서로 대전을 안 가려고 하니까 (구단주 회의에서) MBC에 먼저 서울 연고 조건을 준 거고 OB에는 '대전에서 3년을 보내면 서울로 연고를 옮겨주겠다'는 얘기를 한 거다. 그때는 드래프트에서 선수를 학교 연고로 뽑았다. 광주상고나 광주일고를 나왔으면 무조건 해태로 가야 했다. 다만 광주 출신인데 서울에서 학교를 졸업했으면 해태를 못 갔다. 난 동대문상고를 나와 무조건 서울이었다."
-원년 전지훈련을 마산에서 보냈는데. "말이 전지훈련이지 제대로 된 운동장이 있었겠나. 프로도 아니었지. 당시 마산고나 마산상고 운동장을 빌려 연습했는데 김성근 감독이 마산상고 감독을 오래 하셔서 마산하고 인연이 있었다. 원년에는 전지훈련을 마산에서만 한 40일 정도 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호텔에서 묵지 않고 '한진여관'이라는 곳에서 잠을 잤다. 당시 '한진여관' 사장이 윤상원 KBO 심판위원의 아버지였다. 그때 체중이 94㎏ 정도였는데 10㎏을 빼고 올라왔다. 체중을 줄일 방법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가면 숙소에서 운동장까지 뛰어다녔다. 왕복 5㎞ 정도 거리였는데…나중에 밥 먹을 때 수저들 힘이 없더라. (웃음) 그렇게 체중 조절을 했으니 개막전 때 얼마나 몸이 가벼웠겠나."
-박용곤 구단주의 야구 사랑도 대단했는데. "구단 창단 후에 당시 박용곤 구단주가 선수단 미팅을 하는데 '우리가 삼성을 이길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말하더라. 그런 뒤 '여러분들이 삼성에 이길 건 하나밖에 없다. 그게 바로 야구입니다. 저는 사람 좋은 것보다 야구 잘하는 사람을 원합니다'라고 강조하셨다. 구단 창단해서 선수단에 처음 한 말이었는 데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원년에 유독 삼미(16전 전승)에 강한 이유가 있었나. "삼미가 워낙 약했다. 당시 야구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OB를 삼미 다음으로 꼽았다. 삼미가 꼴찌 후보였고 'OB는 잘해야 5등 한다'는 얘길 많이 들었다. 다른 구단 이기기 힘들 거라고 하더라. 그런데 우승을 했으니 얼마나 큰 이변이었나. 그때 멤버가 꽤 탄탄했다. 1번 타순에 구천서와 양세종이 번갈아가면서 들어갔고 3번은 내가 쳤다. 4번은 김우열, 5번은 김유동과 신경식, 하위 타순을 이홍범·이근식·유지훤이 맡았다. 포수는 조범현과 김경문이었다. 개막하기 전까지 다른 팀에서 신경식이나 구천서 같은 선수를 몰랐을 거다. 두 선수는 실업야구 상업은행에서 뛴 경력이 있어서 난 실력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 정도 멤버면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특히 OB는 타선이 강했는데. "백인천(당시 MBC) 감독이 규정타석을 채워 타격왕(0.412)에 올랐지만, 타격 10걸에 OB 선수(4명)가 꽤 있었다. 내가 백인천 감독과 경쟁하다가 마지막에 밀려 2위(0.342)였다. 신경식(0.334), 김우열(0.310), 구천서(0.308)까지 쟁쟁했다. 타격보다 투수가 약했다. 투수진이 은근히 괜찮았지만, 유명한 투수가 부족했다. 삼성과 비교하는 게 어려웠다. 우린 박철순 하나였는데 삼성은 그때 황규봉·권영호·이선희까지 국가대표 투수가 즐비했다. 그런 삼성을 우리가 한국시리즈에서 박살 냈다. (웃음)"
-당시 룸메이트는 누구였나. "내 룸메이트는 나이가 가장 어린 김진홍이었다. 그때는 고참과 막내가 함께 썼는데 김우열은 항상 김광수를 데리고 다녔다. 같은 선린상고 출신이라는 게 이유였다."
-프로야구 원년 가장 인상적이었던 선수는. "역시 백인천 감독이라고 볼 수 있다. 굉장히 인상 깊었다. 일본에서 프로생활을 했다는 걸 야구장에서 실감할 정도였다. '일본 프로야구 벽이 높구나'하는 생각도 들더라. 일본에는 잘하는 선수가 더 많지 않았겠나. 한국에 와서 이 정도 활약하니까 일본 야구 수준을 가늠할 수 있었다."
-상대하기 어려웠던 '천적'이 있었나. "삼성의 이선희 투수였다. 왼손 투수인데 유독 이선희만 만나면 힘들었다. 아무래도 잘 던지기도 했고 결과적으로도 많이 약했다."
-프로야구 원년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당연히 한국시리즈 우승 아니겠나. 1차전을 대전에서 하고 2차전을 대구에서 하는 일정이었다. 3차전부터 7차전까지는 모두 서울에서 하는 데 대전 첫 경기가 무승부(현장 15회 3-3)였다. 2차전은 대구에서 완전 박살(0-9)이 났다. 콜드게임으로 끝나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삼성에는 어렵다는 걸 실감했다. 2차전을 크게 지고 난 뒤 부담을 안고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당시 박용민 단장이 '내일 아침에 서울 가면 무조건 숙소생활이다'고 하더라. 당시에는 경기 끝나면 술을 자주 먹던 시절인데 단체로 묶어놓을 생각이었던 거 같다. 그런데 이광환 코치가 '안 됩니다, 합숙시키면 안 되고 풀어줘야 한다'고 얘길 했다. 그렇게 해서 대구에서 단체로 술을 먹고 서울로 올라왔는데 숙소도 들어가지 않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 (웃음)"
-분위기가 확 달라졌나. "3차전부터 4연승을 해 우승한 거 아닌가. 7차전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대구에서 술을 먹으면서 패한 걸 다 잊고 서울에 올라온 게 컸던 거 같다. 이광환 코치는 당시에 지면 관두겠다며 사표를 들고 다녔다고 하더라. 서울에 오자마자 4연승을 했으니 기적 아닌가. OB는 당시 우승을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했으니 난리가 났다."
-개막전 때 부정배트 논란도 있었는데. "그때 방망이는 내가 봐도 어느 정도는 알루미늄배트로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박용민 단장이 기자 생활도 오래 하면서 일본 특파원을 했었다. 야구를 좋아하니까 일본에서 배트를 수입했는데 아마 사용 정지된 배트를 사 온 게 아닌가 싶다. 선수들은 구단에서 나눠준 배트를 썼다. 포항제철에선 알루미늄 배트를 쓰다가 프로에 오면서 나무 배트를 썼다. 당시엔 압축배트나 이런 거에 대한 지식이 없던 시절이다."
-좀 더 빨리 프로야구가 출범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없었나. "프로야구를 한다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도 못했던 시절이다. 프로야구 출범할 때 포항제철 박태준 회장의 공이 크다는 얘길 많이 들었다. 그분이 야구를 참 좋아해 노력도 많이 했다더라."
-최근 프로야구에서 눈에 띄는 선수가 있다면. "종범이 아들(키움 이정후)이다. 대단한 선수더라. 아비보다 낫다고 본다. (웃음) 이종범은 체격이 크진 않지만 야무지게 생겼는데 이종범 아들은 어떻게 보면 약해 보일 수 있더라. 그런데 1년 사이에 몸도 더 좋아진 거 같고 요즘엔 홈런도 잘 치지 않나. ‘야구천재’라고 본다. 팀 공헌도는 다른 선수들보다 더 좋은 거 같다. 발 빠르고 타격 잘하고 수비도 좋고 뭐 하나 아쉬운 게 있나. 이젠 파워까지 겸비했다. 이정후에게 도전할 만한 타자는 강백호(KT)인데 둘을 놓고 감독으로서 선택하라면 이정후다.“
-일간스포츠에 대한 추억이 있나. "1983년인가 일간스포츠에 가서 한국시리즈 해설도 하고 관전평도 쓰고 그랬다. 당시 한국시리즈(해태-MBC)가 광주에서 열렸는데 현역 선수다 보니까 광주를 못 가고 일간스포츠에서 TV 켜놓고 경기를 봤던 기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