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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발망이 만든 첼시 유니폼이라고?

1980년대 잉글랜드에 등장한 캐주얼 훌리건은 이탈리아, 프랑스의 화려한 패션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라코스테, 휠라 같은 고급 스포츠 웨어를 즐겨 입던 이들의 취향은 1990년대 들어 변화를 겪는다. 변화무쌍한 날씨의 영국에서는 세련되고 견고한 옷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버버리, 프라다, 아르마니, 랄프 로렌, 스톤 아일랜드 등의 명품 브랜드를 훌리건은 즐겨 입기 시작했다.당시 명품 브랜드는 축구와 얽히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축구는 노동자 계급의 스포츠였고, 폭력적 이미지를 가진 훌리건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축구 산업의 상업적 성공과 유명 선수가 하나의 브랜드로 진화하면서, 명품 브랜드도 축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축구 유니폼에도 유명 디자이너가 가세해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셔츠가 나타나게 된다. 일본 출신의 유명 디자이너 요지 야마모토와 아디다스의 협업이 대표적인 예다. 2014년 챔피언스리그에 나선 레알 마드리드는 아디다스 셔츠의 몸통에 전설적인 동물인 드래곤이 새겨진 키트(kit)를 선보였다. 야마모토는 셔츠에 드래곤을 디자인함으로써 레알 마드리드의 위대함과 영광을 표현할 목적이었다고 한다. 2022년은 레알 마드리드가 창단된 지 120주년 되는 해였다. 또한 야마모토와 아디다스의 컬래버로 만들어진 브랜드 Y-3의 20주년이기도 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마드리드는 아디다스가 아닌 Y-3가 새겨진 셔츠를 출시해 2022년 3월에 열린 ‘엘 클라시코’에서 처음 선보였다. 하지만 경기는 마드리드의 0-4 대패로 끝났다.유명 디자이너와 스포츠 제조사의 협업을 넘어, 럭셔리 브랜드가 키트 스폰서로 축구 시장에 직접 뛰어든 경우도 있다. 김민재 선수의 활약으로 국내 팬들에게도 친숙한 나폴리는 엠포리오 아르마니의 스포츠 브랜드인 EA7과 2021-22시즌부터 키트 스폰서 계약을 맺었다. EA7이 새겨진 나폴리 어센틱 셔츠가 125유로에 판매되자 일부 언론은 축구 역사상 가장 비싼 키트가 나왔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이는 명백한 오보였다. 같은 시즌 아디다스가 제작한 유벤투스의 셔츠는 140유로였고, 퓨마가 만든 AC 밀란의 가격은 120유로로 나폴리와 큰 차이가 없었다.여러분은 혹시 “럭셔리 브랜드가 축구 키트를 제작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물론 현실적으로 비싼 가격 등 여러 문제는 있다. 하지만 명품 브랜드와 축구가 이렇게 가까워질지 과거에는 예상도 못 했듯이,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근래에 들어 더욱더 많은 명품 브랜드가 유럽의 빅 클럽들과 패션 파트너십을 맺고 있으며, 축구 스타를 앰버서더로 선정해 홍보 효과도 노리고 있다. 필자와 잠깐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필자가 선정한 클럽은 첼시다. 20세기의 첼시는 그리 성적이 좋은 팀이 아니었다. 1954~55시즌 우승, 1969~70시즌 FA컵 우승과 1970~71시즌 UEFA 컵 위너스 컵 우승이 이들이 내세울 만한 성적의 전부였다. 하지만 1996년 루드 굴리트에 이어 1998년부터 감독을 맡은 잔루카 비알리의 지휘 아래 첼시는 여러 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이어 2003년 러시아 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를 새 구단주로 맞이하며 첼시의 전성시대가 열린다. 하지만 20세기 특히 1950년대 이전 첼시의 성적은 초라했다. 이에 당시 코미디언들은 “첼시는 도대체 언제 우승하느냐”고 조롱하곤 했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39 계단(The 39 Steps)’에 나오는 ‘미스터 메모리’라는 인물은 “첼시가 기원전 63년 네로 황제가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우승했다"라고 말해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게다가 1930년대 첼시 공격수였던 잭 콕은 축구 영화 ‘The Great Game’의 주연이었고, 첼시 선수 여러 명이 찬조 출연했다. 이러한 이유로 첼시 선수들은 훈련장에서의 모습보다 유명 클럽에서 모델 혹은 배우들과 찍힌 사진이 더 잘 어울린다는 인식을 심어주게 된다.첼시의 홈구장 스탬퍼드 브리지는 켄싱턴과 첼시 버러(borough, 자치구)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1인당 연 소득이 6만 5000파운드(1억원)다. 전국 평균(1만 9500파운드)의 3배가 넘는다. 축구 팬으로 범위를 좁혀도 첼시 팬의 1년 수입은 웨스트 햄 팬보다 2배가 넘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버풀 팬보다 각각 64%, 75% 많다. 따라서 잉글랜드 축구 팬 중에서 첼시 팬의 씀씀이가 가장 크다.이 자치구의 나이트 브리지에는 영국을 대표하는 고급 백화점 헤롯이 있다. 또한 뉴욕 최고의 쇼핑가인 5번가와 비교되는 슬론 스퀘어(Sloan Square)도 이곳에 있다. 슬론 스퀘어에는 고급 아파트, 다양한 명품 브랜드 상점 외에 세계적인 미술관인 사치 갤러리도 위치해 문화적 명소로도 이름이 높다. 필자도 이곳에서 서블렛으로 몇 개월 산 경험이 있는데, 눈요기할 것은 많았지만, 비싼 물가에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이외에도 스탬포드 브리지 근처에는 유명한 킹스 로드(King’s Road, 17세기 찰스 2세의 전용 길에서 이름이 유래)가 있다. 킹스 로드는 런던 패션, 예술, 음악계의 중심지다. 전설적인 그룹 레드 제플린의 레코드 회사가 킹스 로드에 있었고, 데이비드 보위, 밥 말리 같은 유명 뮤지션도 근처에 살았다. 또한 런던 패션을 상징하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남자 친구 말콤 맥라렌이 운영해 펑크의 대중화를 이끈 ‘섹스 부티크’도 킹스 로드에 있었다. 영국에는 20세기를 상징하는 문화의 발상지인 킹스 로드와 첼시 FC를 동의어로 보는 시각도 있다. 과거의 첼시 선수들은 축구는 못했지만, 화려했고 자유로웠다. 최근의 첼시는 뛰어난 실력에 세련됨마저 갖췄다. 이에 첼시의 키트 스폰서로 필자는 프랑스의 럭셔리 브랜드 발망(Balmain)을 선정했다. 발망의 호화로운 색감과 현란한 디자인은 첼시가 가진 고급스러운 도도함과 멋진 조화를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3.07.2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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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런던 축구팬 공공의 적, 토트넘

20개 클럽이 속한 프리미어리그(EPL)는 잉글랜드 축구리그 시스템의 최상위 단계다. 하위 리그인 2부(챔피언십), 3부(리그 1), 4부(리그 2)에는 각각 24개 팀이 속해 있다. 즉 1~4부리그에 속한 팀이 총 92개이고, 이들은 전업(full-time) 프로 축구 클럽이다. 92개 팀 중 2021~22시즌을 기준으로 런던을 연고지로 하는 클럽은 13개다. 이 중 아스널, 첼시, 토트넘, 웨스트햄이 런던을 대표하는 팀이다. 아스널, 첼시와 토트넘은 1992~93시즌 출범한 EPL 역사에서 한 번도 강등된 적이 없다. 1993~94시즌 EPL에 합류한 웨스트햄은 두 번의 강등과 승격을 겪으며, 26시즌을 이곳에서 보냈다. 메이저 대회 우승 횟수를 기준으로 4개 팀의 순위를 매겨보자. 아스널은 47회 트로피를 들어 올려 런던팀 중 최고의 성적을 올렸다. 잉글랜드 클럽 중에서는 세 번째로 우승을 많이 한 팀이 아스널이다. 참고로 잉글랜드에서 우승을 가장 많이 한 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66회)이고, 다음이 리버풀(64회)이다. 토트넘은 잉글랜드 클럽으로는 최초로 1960~61시즌 더블(리그와 FA컵 우승)을 달성했다. 1962~63시즌에는 영국(UK) 클럽 최초로 유럽대회인 컵 위너스 컵에서 우승했다. 토트넘은 현재까지 26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고, 오랫동안 런던에서 2인자로 군림해 왔다. 하지만 21세기에 토트넘이 우승한 대회는 2007~08시즌 풋볼 리그 컵이 유일하다. 21세기에 토트넘을 추월한 팀은 첼시다. 구단주이자 러시아 재벌인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첼시에 대대적으로 투자한 덕에 런던 클럽으로는 유일하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했다. 첼시가 현재까지 들어 올린 트로피 34개 중에서 무려 21개가 아브라모비치 시절(2003~2022년) 얻은 것이다. 웨스트햄은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3부리그로 강등당한 적이 없는 8개 클럽 중 하나다. 웨스트햄은 1965년 유로피언 컵 위너스 컵에서 우승했다. 1966년 잉글랜드의 월드컵 우승 당시 주장이었던 보비 무어가 이 클럽 소속이었다. 하지만 1부리그에서 이들이 거둔 최고의 성적은 3위(1985~86시즌)에 불과하고, 클럽이 들어 올린 트로피도 8개밖에 안 된다. 아스널, 첼시, 웨스트햄을 응원하는 팬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토트넘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손흥민의 소속 팀으로 최근 한국을 찾은 토트넘은 어떻게 런던 축구 팬 '공공의 적'이 됐을까? 물론 아스널 팬이 토트넘을 미워한다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남런던 울위치에 있던 아스널이 1913년 북런던으로 이사하면서, 이들의 치열한 라이벌 관계는 시작됐다. 두 클럽이 벌이는 '북런던 더비'는 EPL 히트 상품 중 하나로 성장했다. 첼시와 웨스트햄의 팬들이 토트넘을 싫어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비록 최근 성적은 다소 주춤하지만, 역사적으로 아스널은 런던에서 제일 강한 팀이었다. 첼시와 웨스트햄 입장에서 아스널은 따라잡기 힘든 상대였다. 따라서 이 두 클럽은 토트넘을 잡아 런던의 2인자가 되고자 했다. 이에 첼시 팬들은 보통 아스널보다 토트넘을 더 싫어한다. 또한 첼시 근교의 풀럼과 퀸즈파크 레인저스(QPR)는 첼시를 지역 라이벌로 여기지만, 이들에게 관심 없는 첼시 입장에서는 라이벌로 보이는 토트넘이 싫은 것이다. 웨스트햄의 최대 라이벌은 밀월이다. 하지만 지난 30년 동안 이 두 클럽이 같은 리그에 속한 적은 네 시즌밖에 없었다. 따라서 웨스트햄의 팬들은 대결할 기회가 제한적인 밀월을 대신해 같은 리그에서 자주 경기하는 토트넘을 제2의 라이벌로 여기고 있다. 특히 토트넘과 연고지가 겹치는 에섹스(Essex)와 북동 런던 지역의 웨스트햄 팬들이 토트넘을 더 미워한다. 118년 동안 토트넘의 홈구장이었던 화이트 하트 레인 근처의 스탬포드 힐에는 유럽에서 가장 큰 정통 유대교 공동체가 있다. 클럽은 오랫동안 런던 동북부의 유대인 공동체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고, 1930년대 토트넘 팬 3분의 1이 유대인이었다. 사실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기는 아스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스널을 응원하는 유대인들은 중산층이었던 반면, 토트넘의 지지층은 노동자계급의 유대인들이었다. 전통적으로 축구는 노동자들의 스포츠이기 때문에 토트넘은 유대인의 클럽이라는 인식이 박히게 된 것이다. 이후 토트넘 팬들은 잉글랜드 내 경기와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 반유대주의자들의 표적이 되곤 한다. 1960년대 토트넘과 맞붙은 팀의 팬들은 반유대주의 구호인 “Yids”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에 토트넘 팬들은 자신을 "Yid Army(이드 아미·유대인 군대라는 의미)”로 칭했다. “Yid”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자랑스럽게 받아들이고, 모욕과 차별에 맞선 것이다. 한편 첼시와 웨스트햄의 우익(right-wing) 성향을 가진 일부 훌리건들은 토트넘을 너무 미워한 나머지 도를 넘는 행동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때도 있다. 이들은 경기 중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의 가스실 소리를 흉내 내기도 한다. 또한 “Adolf Hitler is coming for you(히틀러가 너를 잡으러 올 거야)” “I’d rather be a Paki than a Jew(유대인이 되느니 차라리 파키가 되겠어, Paki는 파키스탄 혹은 남아시아 출신을 비하하는 단어)”와 같은 구호를 외치며 토트넘 팬들을 모욕할 때도 있다. 현재 토트넘 팬 중 유대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5%라고 한다. 즉 팬들의 절대다수는 유대인이 아니다. 아울러 요즘 경기장에서는 상대방 팀 팬들의 ‘Yid’라는 구호도 거의 안 들린다고 한다. 그러나 경기장에서 “Yid army”를 아직도 외치고 있는 비유대인 토트넘 팬들의 모순적인 행동에 반감을 갖는 이들도 있다. 토트넘의 1부리그 마지막 우승 연도는 1961년이다. FA컵 정상도 1991년 이후 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토트넘 팬들은 언제나 그들의 패배나 실망을 정당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곤 한다. 그리고 “내년에는 우리가 이길 거야”라는 불굴의 태도를 갖는다. 지역 라이벌 팀 팬 입장에서는 도저히 꺾을 수 없는 토트넘의 이런 정신이 거슬릴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2.07.13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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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랩소디] 여러분의 옷장에는 이미 훌리건 옷이 있다

맥주와 펍(pub), 미트 파이(meat pie) 등은 영국축구 문화의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하나 더. 훌리건을 빼놓을 수 없다. 공 하나를 두고 22명의 선수가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축구가 우리 곁에 있는 이상, 훌리건이즘(hooliganism)은 잉글랜드의 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1970년대 후반 리버풀 훌리건들은 유럽클럽대항전에 참가한 리버풀을 쫓아 대륙으로 넘어갔다. 훌리건들은 처음 보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화려한 패션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로컬 상점을 약탈했고, 전리품인 고급 스포츠웨어와 디자이너 브랜드 옷을 걸치고 귀국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들이 돌아올 때 영국 경찰은 닥터마틴 스타일 부츠를 신은 스킨헤드 훌리건에 집중하다가, 값비싼 옷을 입은 리버풀 훌리건들을 놓쳤다는 것이다. 이후 대륙의 새로운 패션이 영국 전역에 퍼졌다. 그 결과 라코스테, 엘레세, 휠라 등의 브랜드가 인기를 얻었다. 당시 클럽대항전인 유로피언컵 등에는 국가당 하나의 축구클럽만 참가할 수 있었다. 따라서 훌리건들의 쇼핑 기회도 제한됐다. 대신 그들은 비슷한 스타일의 영국 브랜드를 이용했다. 덕분에 인기를 얻은 브랜드가 프레드 페리, 라일 앤 스코트 등이다. 이러한 스타일의 훌리건을 캐주얼(Casuals)이라고 부르게 됐다. 현재까지 캐주얼이란 단어는 훌리건 집단을 대표해 사용되고 있다. 1978년 개봉된 영화 ‘사망유희’에서 이소룡은 노란색 운동복을 입어 큰 인기를 얻었다. 이에 사람들은 체육관 밖에서도 지퍼 달린 상의와 바지로 구성된 운동복을 즐겨 입게 된다. 트랙수트(tracksuit)라고 부르는 이 스타일도 캐주얼 훌리건들의 사랑받는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새로 등장한 캐주얼 훌리건들의 옷차림에는 여러 가지 전략적 의미가 담겨있었다. 훌리건들은 테니스 스타 같은 세련된 옷을 입기도 했다. '저런 옷을 입고 난투극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덕분에 그들은 경찰의 감시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러한 옷을 입은 훌리건들은 펍에 출입하기 쉬웠고, 라이벌 그룹으로 침투할 수 있었다. 훌리건들은 라이벌 그룹과 그들의 본거지 펍을 풍비박산으로 만들 때도 '멋지게' 보이기를 원했다. 방송인이자 퀸즈파크 레인저스(QPR)의 열렬한 팬이었던 로버트 엘스는 그의 저서 『The Way We Wore : 우리가 입은 방식』에 이렇게 썼다. “1980년대 우리는 코벤트리로 원정을 갔었다. 코벤트리 시티의 훌리건들은 휠라 옷을 입었으나 사실 당시 런던에서 휠라의 인기는 한물간 상태였다. 우리는 한바탕 하기 전에 그들의 패션을 조롱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스타일 대결에서 진 것을 깨달았고, 전의를 상실했다.” 짓궂은 영국 날씨 때문에 1990년대 캐주얼 훌리건의 옷차림도 변했다. 휠라, 라코스테 같은 레저 웨어는 화창한 날씨에 어울리는 옷이다. 변화무쌍한 날씨에 비바람이 몰아치는 영국 축구장에서는 실용적인 옷이 필요했다. 그래서 편하면서도 세련되고, 견고한 스타일이 인기를 얻었다. 버버리, 아쿠아스텀, 프라다, 아르마니, 랄프 로렌, CP컴퍼니 같은 브랜드가 훌리건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은 배경이다. 훌리건들은 노동자 계급이다. 그렇다고 싸구려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랄프로렌 옷을 사느라 주급을 다 쓰는 한이 있어도, 디자이너 브랜드 옷을 입었다. 상류층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었다. 아울러 일반 서포터스와 차별화되고 싶어 했다. 당시 영국의 거의 모든 펍에서는 캐주얼 훌리건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캐주얼 메이커 중 이탈리아 브랜드인 스톤 아일랜드(Stone Island)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잉글랜드 훌리건들은 1992년 스웨덴에서 열린 유로92 기간 스톡홀름 상점에서 스톤 아일랜드를 발견하고 약탈했다. 잉글랜드가 유로 대회에서 탈락하자 이들은 이 옷을 입고 대규모 난동을 부렸다. 옷 왼팔에 부착된 컴퍼스 로고로 유명한 스톤 아일랜드는 이후 캐주얼 훌리건의 대표 유니폼으로 자리잡았다. 컴퍼스 패치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즐겨 쓰는 켈트 십자가와 매우 유사한 형태다. 때문에 영국 경찰은 스톤 아일랜드 로고와 켈트 십자가의 연관성을 조사하기도 했다. 훌리건과의 깊은 관계 덕분에 이 브랜드를 입은 사람들은 펍 출입을 거부당하는 등의 곤란을 겪었다. 90년대 후반에는 경찰의 관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많은 훌리건이 스톤 아일랜드 옷에서 컴퍼스 로고를 떼어냈다. 이탈리아 브랜드가 훌리건들의 대표 유니폼으로 자리 잡은 이유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 없다. 많은 이들은 컴퍼스 패치에서 답을 찾고 있다. 이 로고는 훌리건들의 축구 열정과 싸움을 마다치 않는 용기를 상징한다고 한다. 2000년대 들어 훌리건들은 경찰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특정 브랜드에서 탈피하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스톤 아일랜드, CP컴퍼니, 라코스테 등과 같은 훌리건의 대표 브랜드는 지금도 사랑을 받고 있다. 버버리와 프라다는 훌리건들 탓에 브랜드 가치가 하락하는 걸 심각하게 고민했다. 특히 버버리는 훌리건과 차브(Chav·비행청소년 집단)가 자사의 옷을 입은 채 공공장소에서 마약을 하고, 난동을 부리는 상황에 골머리를 앓았다. 결국 버버리는 특유의 체크무늬를 가리고, 이를 제품 안감으로 사용하는 디자인 혁신을 단행했다.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치는 영국 훌리건의 행동에 '영국병(The English Disease)'이라는 말도 생겼다. 그러는 동안 훌리건들은 독특한 패션 문화를 발전시켜 오늘에 이르렀다. 독자들의 옷장에도 이 칼럼에서 언급한 브랜드 옷이 있을 것이다. 코로나19으로 인해 지치고 힘든 요즘, 훌리건 스타일로 잠깐의 일탈을 해보는 건 어떨까. 모즈(Mods)나 캐주얼 어느 것이라도 상관없다. 훌리건 옷을 입고 TV에서 축구 경기를 보자. 시원한 맥주와 함께 한국식 치킨도 곁들이자. 잠깐이지만,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여행이 될 것이다. 이정우 경영학 박사(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0.10.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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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총리 “축구 비극 ‘힐스보로 참사’..깊이 사과”

축구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였던 힐스보로 참사에 대해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사과했다.영국 언론들은 13일(한국시간) 일제히 '힐스보로 독립 패널'(Hillsborough Independent Panel)이 발표한 보고서의 주요 내용을 전했다. 무려 45만 페이지 분량의 보고서에는 영국 경찰이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것과 사망자 96명 중 41명이 제때 응급조치를 받지 못해 사망한 사실 등이 담겨있었다. 이 보고서는 영국 하원에 제출됐으며, 13일 공개돼 큰 파장을 일으켰다. 힐스보로 참사는 1989년 4월 15일 잉글랜드 셰필드의 힐스보로 스타디움에서 열린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FA컵 준결승 경기에서 경기장 입구에 엄청난 팬이 몰려들어 무려 96명이 질식해 사망하고 700여명이 다친 대형 사고였다. 당시 사고로 영국 축구는 각 경기장에 입석(스탠딩석)과 음주를 금지시키고, 훌리건들을 적극 진압하는 개혁을 단행해 영국 축구 문화 개선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그러나 영국 경찰들은 경기장 안전 관리 과정에서 부주의와 실수가 있었음에도 이를 조작해 참사의 책임을 축구팬들에게 돌린 것으로 밝혀졌다. 또 응급 조치 과정에서도 문제가 드러나 더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다.이에 캐머런 총리는 성명을 발표하고 "정부와 나라를 대표해 지금껏 바로 잡히지 않은 채 오랫동안 남겨졌던 부정의에 대해 깊이 사과한다"면서 "23년동안 고통을 받았을 희생자 유가족들에게 정식으로 사죄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에드 밀리번드 영국 노동당 당수는 "23년만에 이 일이 밝혀진 데 대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면서 총리에게 이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김지한 기자 2012.09.13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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