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여기 한 여학생이 있다. 친구들 사이에서 목소리도 크고 행동도 거침없으니 요즘 말로 ‘인싸’다. 선생님을 상대로도 너스레를 잘 떠는 이 친구는 어쩐지 사과만 보면 속이 거북해지지만, 장난스러운 반응으로 넘긴다.
주변 친구들은 저마다 그 이유를 갖다대 보며 그를 아는 체해보지만 사실 뭐하나 맞는 말은 없다.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은 열여덟 청소년 주인(서수빈)을 둘러싼 세계를 통해 그 선의 혹은 다정함 이면의 타인을 향한 무심한 판단을 이야기 삼는다.
‘세계의 주인’은 전작 ‘우리들’과 ‘우리집’을 통해 틀에 갇히지 않은 아이들의 눈높이로 세상을 탐구했던 윤 감독의 6년 만의 신작. 전작들에 비해 연령대를 고등학생으로 높여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애써 눈을 돌리고 싶어질 수 있는 화두를 꺼내왔다.
극중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주인공 주인이 반 친구 수호(김정식)가 주도하는 서명운동에 동참하지 않기로 하면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출발한다. 주인이 서명을 거부하는 이유는 명확했지만 쉬이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집요한 추궁이 이어지자, 주인은 홧김에 그 이유를 고백해 버리고 더욱 이상한 눈총을 받게 된다. 언제나처럼 농담이었다고 넘겼지만 주인에게 익명으로 쪽지가 오기 시작한다. 관종이냐, 거짓말쟁이냐, 무엇이 너의 ‘진짜’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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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주인이 과거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 진실에 다가가는 구성으로 영화는 흘러간다. 교실에서의 고백을 기점으로 그간의 모든 장면이 단서가 되고 주인을 바라보던 관객의 시선도 바뀌는데, 등장인물의 반응을 통해 마치 거울처럼 돌려주는 점이 이 영화의 놀라운 지점이다.
윤 감독은 선입견은 물론 “괜찮냐”는 걱정조차 때론 ‘피해자다움’의 자기 증명을 요구하는 것 만큼이나 아프다고 주제를 확장한다. 그러면서도 상처를 끌어안고도 당당히 살아가고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내는 사람들의 세계를 따스하게 보여준다. 그렇다고 가르치거나 위로하려는 톤은 아니다. 자극적이고 호기심도 부르는 남 이야기 같겠지만 실은 우리 모두가 각자 세계의 ‘주인’들이라고 툭 건넨 쪽지처럼 조곤조곤 말을 걸 뿐이다.
어느 삶의 풍경을 들여다본 듯한 자연스러운 화면과 배우들의 호연도 리얼리티를 뒷받침한다. 이 영화로 데뷔하는 신예 서수빈은 있을 법한 친근한 얼굴로 사춘기 감수성과 어른스러움을 오간다. 윤 감독의 페르소나인 장혜진은 이번엔 주인의 엄마 태선 역으로 무너질 듯 보이지만 단단한 모성을 그려낸다. 주인과 공감대를 형성한 선배 미도 역으로 출연한 고민시의 새로운 얼굴도 눈길을 끈다. 사진=바른손이앤에이 제공사진=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려는 열여덟 청소년의 이야기는 지켜보는 관객의 세계까지 넓힌다. 민감하고 내밀한 주제지만 사전 정보나 편견 없이 바라볼수록 그 울림은 크게 다가온다. 지아장커, 고레에다 히로카즈, 연상호 등 세계 감독이 사랑하고 한국 영화 최초로 제50회 토론토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아 세계를 놀라게 한 이유 있는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