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보검이 5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콘래드 호텔에서 열린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 제작발표회에 참석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서병수 기자 qudtn@edaily.co.kr /2025.03.05/
“다 때려 엎든 간, 뿌수든 간. 넌 요이 땅만 해. 그럼 내가 개가 될게. 난 노선 같은 건 확실해.”
배우 박보검이 낯선 얼굴로 사랑을 고백한다. 데뷔 후 왕왕 맡아왔던 멜로물의 남자 주인공인데, 전에 없던 우직함에 투박함까지 더해졌다. 그에게 “반하크라”(반하다란 뜻의 제주도 방언)이지 않을 수 없다.
박보검의 신작은 지난 7일 첫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다. 매주 4회차씩 순차 공개 중인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에서 태어난 ‘요망진 반항아’ 애순(아이유·문소리)과 ‘팔불출 무쇠’ 관식(박보검·박해준)의 모험 가득한 일생을 사계절로 풀어낸 작품이다.
넷플릭스 공식 집계 사이트 투둠에 따르면 드라마는 공개 첫 주 사흘 만에 360만 시청수를 기록하며 넷플릭스 글로벌 톱10 TV쇼 비영어 부문 4위에 등극했다. 대한민국의 시대극이란 한계를 극복한 유의미한 성과로, 탄탄한 서사와 아름다운 풍광, 전 세계를 관통하는 메시지 등 다양한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한국에선 공개된 뒤 줄곧 1위를 기록 중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인기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박보검의 열연에서 오는 흡인력이 상당하다는 평가다. 박보검은 ‘폭싹 속았수다’에서 남자 주인공 관식을 연기했다. 운동도, 장사도, 어떤 힘든 것도 군소리 없이 해내는 인물로, 어린 시절부터 애순(아이유)을 위해서라면 생선이고 고기고 일단 갖다 바치고 보는 ‘개코딱지’(극중 애순이 부르는 애칭)만한 사랑꾼이다.
동시에 지나치게 투박하고 투명한 순정남이기도 하다. “허구헌 날 멕이기만 했지. 어째 꼬시지를 안해”란 애순의 말에 주먹까지 꽉 쥐어가며 한다는 게 뽀뽀가 아닌 ‘인중’ 박치기고, “말이라도 좀 그냥 다 해준다고 해”라는 타박에 “(다는 못해주지만) 하나는 죽어도 해줄게. 구라는 못쳐”라고 받아치는 식이다. 달콤한 고백은커녕 빈말 듣기도 쉽지 않다.
물론 이 모든 걸 능가할 ‘한 방’은 있다. “노스텔지어도 모르는 섬 놈에게 시집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애순의 말에 시큰둥하게 반응해 놓고는 어느날 다짜고짜 유치환의 시 ‘깃발’(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을 왼다거나, 항구에서 자신을 부르며 오열하는 애순의 목소리에 주저 없이 배에서 뛰어 내려 헤엄쳐 돌아온다.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 스틸 / 사진=넷플릭스 제공
박보검이 해온 수많은 로맨스물 속 주인공과는 확실히 다른 결이다. 대체로 멜로 영화나 드라마 속 박보검은 단단했지만 부드러웠다. 최근 로맨스물 소비층의 취향이기도 했고 박보검이란 배우가 지닌 이미지, 예컨대 무해함, 순박함 등의 영향도 컸다. 프레임 속 그는 언제나 다정했고 달콤했으며, 때때로 유약했다. 곧잘 흔들렸고, 커다란 눈망울에는 자주 눈물이 차올랐다.
반면 ‘폭싹 속았수다’ 속 박보검은 시종 듬직하고 의젓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여자의 시선이 닿는 곳에 흔들림 없이 서 있는다. 이러한 면면은 관식이 청장년에 들어서고 ‘아빠’라는 역할이 더해지면서 더욱 도드라진다. 아무 말 없이 아내와 딸의 밥그릇에 보리콩을 올려주고, 요즘 말로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집을 나서며, 기꺼이 가장의 무게를 짊어진다.
박보검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낯선 얼굴들을 매끄럽게 그려내고 또 연결한다. 그는 관식의 적은 대사, 크지 않은 감정 굴곡에서 생긴 여백을 섬세한 표현력으로 채워냈다. 군대를 통과하고도 살아남은 꽃미남 얼굴은 순간순간 과거의 박보검을 떠올리게 하지만, 눈빛과 연기, 몸짓에는 확실히 여유와 강단이 보태졌다. 이전보다 성숙하고 깊이 있고 복잡하다. 자연스러운 연기 스펙트럼의 확장으로, 배우 박보검에게 새로운 인장이 찍히는 순간이다.
김성수 대중문화 평론가는 “이 작품은 박보검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간 필모그래피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모습”이라며 “이전의 박보검은 대개 차분하고 감성적인, 따뜻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연기했다. 이미 충분히 획득한 자에게서 나오는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관식은 다르다. 사랑을 지키고자 그냥 부딪힌다. 그의 인내와 절제조차 충분한 계산을 거치지 않은 것”이라고 짚었다.
이어 “‘폭싹 속았수다’는 박보검이 전역 후 처음 선택한 작품이란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보통 공백기를 보내면 안정적인 선택을 한다. 과감한 도전이 필요할 때지만, 실패 확률이 높기 때문에 불안한 거다. 하지만 박보검은 그걸 선택했다. 굉장히 영리하거나 굉장히 용기 있는 것”이라며 “관식은 박보검의 인생 캐릭터 중 하나로, 앞으로 그의 연기를 얘기할 때 반드시 언급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