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태국의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은 유독 이슈가 많은 경기였다. 지난 2023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4강 탈락 이후 치르는 첫 경기였기 때문이다.
아시안컵에서 부진했던 대표팀 경기력이 과연 얼마나 달라졌을지, 어떠한 경기력으로 팬들의 아쉬움을 달랠지부터 관심이 쏠렸다. 임시 사령탑이긴 하더라도 황선홍 감독이 이끄는 A대표팀은 어떤 모습일지, 아시안컵 기간 깊었던 갈등을 푼 손흥민(토트넘)과 이강인(파리 생제르맹)은 그라운드 위에서 어떤 호흡을 보여줄지도 팬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이강인을 향한 관중들의 반응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정작 이날 가장 많은 관심이 쏠린 이슈는 따로 있었다. 국가대표팀 서포터스인 붉은악마의 이른바 안티콜과 안티배너였다. 정몽규 회장과 이석재 부회장, 황보관 기술본부장 등을 비롯한 대한축구협회 전체를 겨냥했다. 최근 벌어진 한국축구의 각종 논란과 문제점의 핵심은 대한축구협회라는 의미가 담겼다.
앞서 태국전 응원을 보이콧해야 한다는 일부 팬심과 달리 붉은악마는 “보이콧 없이 선수들에게 더 큰 목소리로 응원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던 상황. 자연스레 이날 붉은악마의 분위기 역시 최근 한국축구를 둘러싼 상황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보다는 선수들의 응원에 초점이 맞춰질 거란 전망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붉은악마는 예상 밖의 ‘날 선’ 비판 메시지를 대한축구협회에 날렸다.
경기 시작 직전부터 분노 표출이 시작됐다. 붉은악마 서포터스석 곳곳에서 일제히 안티배너가 펼쳐졌다. ‘몽규가 있는 축협에게 미래는 없다’, ‘정몽규의 몽청행위 규탄한다’, ‘정몽규 OUT’, ‘선수들을 제물로 삼는 축협 회장은 필요없다’ 등 정몽규 회장을 직격한 걸개들이 많았다. ‘한국축구 위기는 관때문’, ‘황보관 이석재 정몽규’ 등 황보관 기술본부장과 이석재 부회장 등도 비판 대상이 됐다. ‘선수는 제 탓, 협회는 쟤 탓’, ‘선수들은 방패막이’ 등 일련의 사태들에 대한 대한축구협회의 행정 등을 질타하는 문구들도 눈에 띄었다.
걸개를 들어 올리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서포터스석에서는 “정몽규 나가”, “이석재 나가” 등 외침이 울려 퍼졌다. 특히 “정몽규 나가”라는 외침은 이날 선수들의 이름을 연호하는 것보다 더 자주, 경기 내내 나왔다. 붉은악마에서 시작된 외침은 일반 관중석으로도 번지기 시작했다. 비단 붉은악마만의 목소리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날 경기장엔 정몽규 회장도 이날 경기장에 있었다. 앞서 다른 경기들처럼 경기 전 선수들과 악수를 나누며 격려하던 모습은 없었으나, 친선경기가 아닌 월드컵 예선은 정 회장이 따로 선수단을 격려하지 않는다는 게 협회 관계자의 설명이다. 대신 정 회장은 VIP석에 앉아 경기를 지켜봤다. 직접 붉은악마가 들어 올린 걸개를 보고, 경기 내내 자신을 향해 이어진 팬들의 외침도 직접 들었다. 자신과 대한축구협회를 향한 싸늘한 팬심을 직접 접한 셈이다.
일부 팬들의 사진 촬영 요청에 웃으며 브이(V)까지 해주는 정 회장의 모습이 포착된 걸 보면, 과연 이날 팬들의 분노를 얼마나 심각하게 느꼈을지는 알 길이 없다. 그래도 6만 5000명에 가까운 관중들이 모인 경기장에서 자신과 축구협회를 향한 날 선 팬심을 확인한 만큼, 앞으로는 유의미한 변화나 노력이 있지 않겠느냐는 게 상식적인 기대다. 이날 관중들의 날 선 분노에 대한 답은 이제 정 회장과 축구협회의 몫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