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을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를 삼류 관객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아무 맥락도 없어 보이는 살인자의 장광설을 무슨 대단한 의미라도 있는 것인가 하고 집중해서 듣게 만들고 피가 화면 밖으로 튈 것처럼 과장되게 묘사되는 살인 장면에 혼이 빼앗기어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그렇게 몰입하여 보고 나서 하는 말이 겨우, “피가 흥건하다”입니다.
원래 인간은 피를 무서워합니다. 자기 코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놀라서 기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공포와 쾌락은 맞붙어 있는 감정입니다. 돈을 주고 ‘귀신의 집’에 들어가는 이유입니다. 피가 무서우니까, 피가 흥건한 영화를 보면 짜릿한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살인자의 장광설은 짜릿한 피의 향연이 벌어지기 직전에 긴장을 고조시키는 용도로 더없이 훌륭합니다. 나쁜 짓을 하기 전에 괜히 말이 많아지는 것과 비슷한 일입니다.
인간은 문명 생활을 하기 전 아주 긴긴 세월 원시인이었습니다. 동물의 삶을 살았습니다. 30만 년 전 불을 사용할 줄 몰랐을 때에는 고기를 날로 먹었습니다. 그때에, 날것의 고기에서 돋는 피 냄새는 식욕을 돋우는 냄새였을 수도 있습니다. 육식동물이 사냥감의 피 냄새를 맡고 쫓듯이, 먼 옛날의 인간도 피 냄새가 향긋했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동족끼리의 연대를 강화하는 진화를 거듭하다가 세상 만물에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연민의 동물’이 되었습니다. 동물과 식물은 물론이고 바람과 해, 달, 별, 하늘, 바위에도 사람의 마음이 있다고 여깁니다. ‘사람의 마음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동물에게서 생명을 거두는 일이 힘들어졌습니다. 가축 잡는 일을 특별난 인간집단의 것으로 구획 짓고 도축장을 되도록 멀리 두어 눈에 보이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피 냄새는 거북한 냄새가 되었습니다. 동물에게서 생명을 거두었을 때에 나는 냄새이기 때문입니다.
마트에서 산 소 돼지 닭의 고기에는 피가 거의 없습니다. 도축 과정에서 말끔하게 빼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아주 조금 남은 피를 싹싹 닦습니다. 끓는 물에 살짝 데쳐서 피를 거두어내기도 합니다. 핏내는 완벽하게 제거되어야 할 잡내입니다.
피 냄새를 이처럼 싫어하는 문명 인간이 가끔 엉뚱하게도 피를 즐깁니다. 선짓국이나 피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익힌 피여서 그닥 강력한 ‘공포 쾌락’을 선사하지는 못합니다. 꼬막류의 새꼬막, 참꼬막, 피조개의 피입니다.
조개의 피는 대부분 투명합니다. 꼬막류의 피에는 헤모글로빈이 있어 붉습니다. 헤모글로빈은 철을 함유하고 있어 비릿합니다. 조개의 피인데 척추동물의 핏내를 냅니다. 꼬막류의 피를 제대로 즐기려면 피조개를 날로 먹어야 합니다. 핏물을 뚝뚝 떨어뜨려가며, 터프하게, 소주와 함께. 피조개를 날로 먹는 것은 “쿠엔틴 타란티노가 딱 내 스타일”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어울립니다. 보통의 인간은 한 단계 낮추어야 합니다. 요즘 제철인 새꼬막과 참꼬막을 살짝 데쳐서 먹는 겁니다.
꼬막 삶는 법은 인터넷에 워낙 많이 소개되어 있어 따로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익히는 시간은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짧게 해야 합니다. 익히는 것이 아니라 익히는 척하는 겁니다. 조가비를 벌렸을 때에 살 위로 물이 살랑살랑 잡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핏내를 제대로 즐길 수가 있습니다.
반은 날것인 꼬막의 조가비를 손으로 억지로 벌리고 그 손에 묻은 피를 쪽쪽 빨아가며 먹습니다. 찝찌름한 바다의 맛에 비릿한 헤모글로빈의 맛이 겹쳐지면 내 몸에 가두어져 있던 원시인의 본능이 꿈틀거립니다. “그래 그래, 이 맛이지!”
저는 문명 인간으로 태어나 문명 인간으로 죽을 것입니다. 제 손에 소·돼지·닭의 피를 묻힐 일은 없을 것입니다.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 속 피가 제 몸의 피로 바뀔 확률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핏내가 사라진 세상에 삽니다. 사람을 공격하지도 못하는 꼬막을 손에 들고 헤모글로빈의 맛을 즐길 줄 아는 원시인의 피가 우리 몸에 흐른다며 뻐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