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을 앞두고 두려움이 컸다. 긴장도 많이 했다. 우리가 TV에서만 보던 데릭 지터와 알렉스 로드리게스, 치퍼 존스, 켄 그리피 주니어 등 슈퍼 스타들이 나온다고 하지 않나.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마주하고 맞붙을 생각하니 '과연 어떨까' 걱정이 들었다.
지금까지 총 4차례 열린 WBC에서 필자는 1회·2회·4회 사령탑을 지냈다. 결승까지 오른 2회 대회의 결과가 가장 좋았지만, 1회 대회 내용이 가장 만족스럽고 좋았다.
사실 일본을 상대로는 두려움이 없었다. 아무리 우리보다 한 수 위 전력이라 해도 한일 슈퍼게임을 통해 세 차례나 맞붙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3월 5일 1라운드 일본전에서 약속의 8회, 이승엽의 역전 투런 홈런으로 이겼다. 일본 야구의 심장, 도쿄돔에서 숙적 일본을 꺾자 대회 전부터 가졌던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졌다.
1라운드를 3전 전승으로 통과한 한국은 2라운드가 열린 미국 애너하임으로 이동했다. 주변에선 2라운드 첫 상대인 멕시코를 강팀으로 분류하진 않았지만, 당시 대부분의 선수가 메이저리그 선수로 구성된 만만치 않은 실력이다. 우리가 그런 멕시코를 2-1로 꺾자 자신감이 붙었다.
다음 상대가 최강 미국이었다. 정말 최고의 선수들이 우리 눈 앞에 있었다. 선발 투수로 손민한을 점찍었다. 공은 빠르지 않아도 제구력이 뛰어나고 변화구를 잘 구사한다. 조금 아슬아슬해도 큰 것을 맞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손민한은 3이닝 1실점으로 제 몫을 했다. 3-1로 앞선 4회 말 2사 1·2루 4번 타자 김태균 타석에서 우완 불펜 댄 휠러를 맞아 좌타자 최희섭을 투입했다.
경기 전 최희섭에게 '언제든 대타로 출전한 준비를 해라'고 지시해 놓은 터였다. 최희섭이 더그아웃 아래 지하에서 스윙 중이었다. 마침 미국의 벅 마르티네즈 감독이 앞타자가 이승엽에게 고의4구 작전을 펼치면서 대타 작전을 고민하고 결정할 시간이 충분했다. 최희섭이 3점 홈런을 뽑아 대타 작전이 보기 좋게 맞아떨어졌다. 홈런까지 기대하진 않고 '안타를 쳐달라'고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그런데 최희섭이 홈런이 터지는 순간 '이제부터 투수 교체만 잘하면 이길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3월 15일, 미국 에인절스타디움 오브 애너하임에서 일본과 다시 맞붙었다. 선발 투수 박찬호가 5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하고, 8회 이종범이 결정적인 2타점 적시타를 쳤다. 9회 말 구대성이 1실점하며 흔들렸지만, 오승환이 아웃카운트 2개를 모두 삼진 처리하며 2-1 승리로 매조졌다. 이 경기 승리로 준결승 진출을 확정했다.
이때 서재응이 에인절스타디움의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으며 감격의 승리를 자축했다. 필자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축하 전화를 받느라 자리를 옮겨서 이 장면을 직접 보지 못했다. 나중에 오 사다하루 일본 대표팀 감독이 그 장면을 가장 싫어했다고 들었다. 안 그래도 경기에서 졌는데 한국이 얄밉다고 했더라. 우리로선 앞서 스즈키 이치로가 "상대가 앞으로 30년 동안 ‘일본에는 손을 댈 수 없다’는 느낌이 들도록 이기고 싶다"고 한 터라 더 통쾌했다. 그런데 이치로가 왜 '30년'을 언급했는지 모르겠다. 한국 프로야구는 실질적으로 미국보다 100년, 일본보다 50년 늦게 시작됐다.
일본은 2라운드에서 1승 2패에 그쳤지만, 미국이 멕시코(이상 1승 2패)에 패해 운 좋게 4강에 올랐다. 준결승에서 일본을 다시 만나 0-6으로 져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당시 위기 상황에서 투입된 김병현이 후쿠도메 고스케에게 2점 홈런을 얻어맞고 끌려갔다. 감독으로서 좀 더 계산해서 투수 교체를 신중하게 했으면 홈런을 뺏기지 않았을 것 같아 아쉽다.
하지만 우리 선수들은 최선을 다했다. 대회 6승 1패를 거뒀다. 단 한 경기에 졌다. 경기 내용은 정말 좋았다. 사령탑으로선 굉장히 뿌듯했다. 1회 대회에선 실력과 개성을 갖춘 선수들이 많았다. 박찬호가 선발 투수를 맡고 때론 마무리도 맡아 투수진을 선두에서 이끌었다. 당시로는 해외파였던 김선우와 김병헌, 서재응 등의 합류로 전력이 탄탄했다. 또 이종범과 최희섭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회 홈런왕과 타점왕에 오른 이승엽이 요소요소 잘했다. 교체로 내보낸 선수들도 모두 실력이 대단했다.
이번 대회 미국과 일본, 도미니카공화국 등 우리보다 전력이 좋은 팀이 많다. 하지만 긴장할 필요가 없다. 경기는 끝까지 해봐야 안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