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으로 세상을 느끼는 사람? 아니다, 다시 할게요. 성실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써 주세요.”
영화 ‘유령’으로 돌아온 이해영 감독은 ‘감독 이해영을 어떤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이 같이 대답이었다. 개봉을 며칠 앞두고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가진 인터뷰에서다.
영화 ‘독전’(2018)으로 스타일리시하면서도 꼼꼼한 연출 감각을 보여줬던 이해영 감독은 약 5년 만에 공개한 신작 ‘유령’에서도 예리한 감각을 펼쳐보였다. 밀리미터(mm) 단위까지 신경쓰는 이해영 감독의 섬세함은 주연 배우 설경구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유령’을 본 사람들 사이에서 ‘이해영이 이해영했다’는 말이 나온 것도 이런 이유다.
“‘독전’을 통해서 처음으로 관객들과 밀접한 소통을 했어요. 그게 굉장히 소중한 경험이 돼서 ‘유령’도 그렇게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있길 바라요. ‘유령’에 호감이 가신다면 얼마든지 다가와주세요. 영화와 함께해주시는 관객 분들의 마음에 합당한 답을 드릴 수 있는 감독이 되고 싶어요.”
‘유령’은 1933년 경성을 배경으로 조선총독부에 항일조직이 심어 놓은 스파이 ‘유령 ’으로 의심받으며 외딴 호텔에 갇힌 사람들이 의심을 뚫고 탈출하기 위해 벌이는 사투와 진짜 ‘유령’의 작전을 그린 영화다. 정통 추리극의 형식에 충실했던 원작 소설과 달리 영화 ‘유령’은 진짜 ‘유령’이 누군지 추리가 끝난 이후 내달리는 액션이 또한 볼거리다.
이 과정에서 설경구와 이하늬의 맨몸 액션도 등장한다. 두 사람이 성별, 나이 등의 장벽을 뛰어넘어 액션으로 엉겨드는 장면은 ‘유령’의 백미 가운데 하나다. 이해영 감독은 “처음에는 이하늬가 걱정됐는데 막상 촬영에 돌입하니 설경구가 걱정됐다. 이하늬의 타격감이 세더라”며 웃음을 보였다.
“두 분이 싸우는 장면에선 어떤 순간에도 성별이 느껴지지 않길 바랐어요. 남녀가 싸운다는 느낌이 전혀 안 들게 말이죠. 두 사람의 기세와 감정이 보이길 바랐고, 동물적으로 맞붙는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두 분 모두 너무 힘들었을 텐데 좋은 장면 만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두 배우 너무 잘해주신 덕에 만족스러운 장면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설경구는 특히 이해영 감독의 꼼꼼함 때문에 고달픈 일이 많았다. 이 감독이 설경구가 극에서 쓴 모자의 각도를 밀리미터 단위로까지 점검한 탓에 같은 장면을 몇 번이나 다시 찍어야 했기 때문이다. 설경구는 이 때문에 “나중에 나오는 연설 장면에서는 내가 모자를 안 쓰겠다고 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이해영 감독은 이에 대해 “설경구 선배의 멋짐을 담기 위한 선택이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게 디테일하게 신경을 쓴 덕에 설경구의 멋진 외모가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스크린에 담겼다는 것. 이해영 감독은 “설경구 선배가 피곤했을 수는 있을 것 같다”며 웃었다.
“사실 촬영할 당시에는 선배가 짜증났다는 걸 몰랐거든요. 분위기 자체는 화기애애했어서요. (웃음) 선배가 연기한 쥰지는 경무국에서 좌천돼 있다가 복귀하는 게 원대한 목표인 인물이잖아요. 우여곡절을 겪고 마침내 복귀하는 그런 장면이기 때문에 제복과 모자가 칼같이 나오길 바랐어요. 한 번에 딱 그 각도가 나와야 멋있지 이미 쓴 모자를 여러 번 고쳐 쓰면 멋이 없잖아요. 특별출연 해준 금새록 배우가 마침 그 장면을 찍는 걸 봤는데, 저더러 ‘감독님 여전하시네요’ 하더라고요. 웃었죠, 뭐.”
이해영 감독에게 멋지게 다가온 건 물론 설경구 뿐만이 아니다. 특히 카이토 역의 박해수에게는 촬영 때마다 “우리 영화를 구원해줄 수호천사”라며 이 감독이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을 정도로 감사함이 크다.
당초 이 인물은 실제 일본인 배우가 연기하기로 돼 있었다. 인물 설정 자체가 한국인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일본인인데다 영화에서 소화해야 할 일본어의 양도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 일이 늘 그렇게 마음먹은 것처럼 되지는 않는 법. 미리 섭외를 다 해놓고 그 배우의 일정에 맞춰 세트까지 지어올리고 있는데 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했고, 일본과 한국 사이엔 무비자 협정이 사라졌다. 누구도 오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때가 ‘유령’을 하면서 가장 고통받았던 시기인 것 같아요.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비즈니스 비자를 신청하면 받을 수는 있었지만, 기간이 3개월 이상 소요됐어요. 사실상 촬영이 어려운 상황이었죠. 거의 패닉에 빠져 있다가 우연히 박해수의 출연작들을 보게 됐어요. ‘이 정도 에너지와 연기력이라면 영화를 완전히 압도하는 위력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했죠. 성실하다는 소문도 들었으니까 뭔가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잘해줄 것 같다는 믿음이 들었고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보냈죠.”
한 번에 출연 결정이 난 건 아니다. 촬영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고 박해수가 소화해야 할 일본어 대사는 너무 많았다. 부담이 없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거절을 할 결심을 하고 나온 박해수의 마음을 돌린 건 이해영 감독의 “우린 할 수 있다. 내가 당신이 할 수 있게 만들겠다”는 한 마디였다. 이해영 감독은 “사실 말은 그렇게 하고 ‘이제부터 일본어 연습해’ 하고 배우에게 떠넘긴 거나 마찬가지였다”고 고백했다.
“세트 시공 순서 때문에 가장 많은 일본어를 구사해야 하는 장면을 앞에 찍게 됐어요. 정말 까다로운 장면이었는데, 그걸 표정까지 살려서 표현해내더라고요. 박해수 배우가 자기 대사와 상대방 일본어 대사를 다 외우고, 또 양쪽의 일본어 대사의 한국어 뜻까지 다 외운 상태로 촬영에 임한 거예요. 정말 괴물같은 성실함을 느꼈어요. 그래서 거의 매번 박해수와 촬영을 할 때마다 ‘당신이 우리 영화를 구원해줄 수호천사’k고 이야기했어요. 박해수는 싫었을 거예요. 얼마나 부담되고 질척거린다는 생각이 들었겠어요. (웃음)”
이런 배우들의 열연과 빛나는 존재감으로 ‘유령’은 인물 하나하나가 살아난 하나의 거대한 캐릭터 영화가 됐다. 이해영 감독은 자신이 탐닉하는 것은 언제나 ‘캐릭터’라고 했다.
“캐릭터가 제겐 이야기에 접근하는 통로인 것 같아요. 영화를 찍으면서도 제가 표현하고 싶은 모든 것들을 배우들을 통해서 하는 것 같고요. 제 생각과 모든 의도를 담는 것은 캐릭터예요. ‘유령’ 역시 마찬가지예요. 이 영화로 뭘 하고 싶었느냐고 묻는다면 캐릭터라고 답하겠어요. 훌륭하고 분에 넘치는 좋은 배우들과 작업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배우들의 매력을 ‘유령’을 통해서 잔뜩 자랑했으니 극장에 와서 만나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