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스포츠 선정 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 외야수로 선정된 장효조. 장효조는 현역 시절 타격왕을 네 차례나 차지한 타격의 교과서였다. 3년 연속 타격왕도 KBO리그 역사상 그가 유일하다. IS 포토 일간스포츠 선정 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 외야수 한 자리는 '타격의 교과서' 장효조의 몫이었다.
장효조는 20대부터 50대까지 세대별 야구인 10명씩 총 40명이 참여한 투표에서 26표를 받아 외야수 최다 득표자로 선정됐다. 외야수는 후보(15명)가 많아 표가 분산됐지만, 장효조는 선·후배들의 고른 지지를 받았다. 그 결과 치열한 경쟁을 뚫고 양준혁(22표) 박재홍(20표)과 함께 '외야수 베스트 3'에 이름을 올렸다.
이종열 SBS 해설위원은 "공격력 면에서 최고의 외야수였다. 장효조 선배님을 보면서 타격을 연구한 선수들이 많았다"며 "어떤 상황에서든 배트 중심에 맞힐 수 있는 선수"라고 떠올렸다. 정경배 SSG 랜더스 코치는 "장효조 선배의 통산 타율은 현역 선수들의 기록보다 그 가치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며 "장효조 선배가 같은 선수가 또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김경기 스포티비 해설위원과 윤동균 일구회 회장을 비롯한 그와 함께 그라운드를 누볐던 선수 대부분이 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로 장효조를 빼먹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같이 비슷했다. "앞으로 나오기 힘든 타자"라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한양대 재학 시절의 장효조. 장효조는 대학교 1학년 때 태극마크를 달 정도로 자타공인 최고의 타자 유망주였다. IS 포토 장효조는 프로야구 역사에 이름을 새긴 전설이다. 1975년 한양대에 진학해 1학년 때 태극마크를 달았다. 2학년 때는 실업팀도 출전한 백호기 대회에서 타율 0.714(14타수 10안타)로 타격왕에 오른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대학 졸업 뒤 포항제철과 경리단에서 활약한 그는 1983년 1차 3순위 지명으로 삼성 라이온즈 유니폼을 입었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나가는 바람에 프로 입단이 1년 늦어졌다.
"프로 적응은 어려울 것"이라는 부정적 전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타석에서 날아다녔다. 첫 시즌 타율이 0.369(317타수 117안타)로 김종모(0.350)와 김성한(0.327·이상 당시 해태 타이거즈)에 앞선 리그 전체 1위였다. 그해 5월에는 8연타석 안타를 때려내며 잠시 4할 타율을 유지하기도 했다. 아쉽게 신인왕과는 인연이 없었다. 실업야구 최고의 타자였던 만큼 '중고 신인'이라는 이유로 박종훈(당시 OB 베어스)과의 경쟁에서 밀렸다. 하지만 1년 먼저 프로 데뷔한 선배들과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며 "역시 장효조"라는 소릴 들었다.
이만수(왼쪽) 김성래(오른쪽)와 함께 1980년대 삼성 라이온즈를 대표하는 레전드였던 장효조. 삼성 제공 장효조의 타격에는 기복이 없었다. 데뷔 후 7년 연속 3할 타율을 기록했다. 1985년부터 3년 연속 타격왕을 놓치지 않았다. 3년 연속 타격왕은 KBO리그 역사상 그가 유일하다. 1987년 기록한 타율 0.387은 1982년 백인천(0.412) 1994년 이종범(0.393)에 이은 역대 3위 기록. 타격만 잘하는 건 아니었다. 1983년과 1986년에는 볼넷 전체 1위이기도 했다. "장효조가 치지 않은 공을 볼이다", "장효조는 배트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을 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탁월한 선구안과 정교한 타격이 트레이드마크였다. 공을 몸에 붙여 그라운드 구석구석 타구를 날리는 '부챗살 타법'은 그를 대표하는 무기였다. 키가 174㎝로 크지 않았지만 지독한 훈련으로 불리한 신체조건을 극복했다. 동료들이 인정한 연습벌레였다.
장효조는 1988년까지 삼성에서 활약하다가 1989년 트레이드로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었다. 그리고 프로 데뷔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1992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1991년 개인 통산 6번째 출루율 1위에 오를 만큼 기량은 녹슬지 않았다. 하지만 이듬해 뜻밖에 부진(82경기 타율 0.265)에 빠졌고 팀 내 입지마저 좁아지자 미련 없이 그라운드를 떠났다. 장효조가 남긴 발자취는 뚜렷하다. 그의 통산 타율은 0.331로 최소 3000타석 이상 소화한 KBO리그 타자 중 역대 1위다. 손아섭(롯데 자이언츠·통산 타율 0.324) 김현수(LG 트윈스·통산 타율 0.319) 박민우(NC 다이노스·통산 타율 0.326)를 비롯해 쟁쟁한 후배들이 그의 아성에 도전했지만, 아직 역부족이다.
2011년 9월 병환으로 별세한 장효조. 그가 떠난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 석자를 기억하고 있다. IS 포토 그뿐만 아니라 장효조는 삼성 타자로는 역대 두 번째로 1987년 최우수선수(MVP)에 뽑혔고 1983년부터 무려 5년 연속 외야수 부분 골든글러브를 받기도 했다. 말 그대로 1980년대를 풍미한 프로야구 간판이었다. 은퇴 후에는 삼성 2군 감독과 타격 코치 등을 역임하며 유망주 양성에 힘썼다. 하지만 2011년 9월 병환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해 신인왕에 오른 배영섭(당시 삼성)은 수상 후 "장효조 감독님 덕분에 이런 성적을 낼 수 있었다. 타격폼을 많이 잡아주셨다. 지금 계시지 않아 속상할 따름"이라고 말해 강한 울림을 주기도 했다.
장효조는 2011년 한국야구위원회(KBO)가 프로야구 30주년을 기념해 진행한 레전드 올스타 투표에도 당당하게 외야 한 자리를 꿰찼다. 시간이 흘렀어도 아직 많은 선수가 그를 기억한다. 박경수(KT 위즈)는 "학생 때 나를 지도해주신 많은 분이 늘 장효조 선배님을 언급하며 '너무 잘 치는 타자'라고 하셨다. 발도 빠르셨다고 들었다"고 떠올렸다. 김혜성(키움 히어로즈)도 "'타격 기계'라는 별명처럼 뛰어난 타자다. 선구안도 좋다고 들었다"며 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로 그에게 표를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