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6일 국민 앞에서 또다시 머리를 숙였다. 삼성그룹을 이끄는 실질적 총수가 된 후 이번이 두 번째 대국민 사과다.
이 부회장은 이날 10분간 이어진 입장문 발표에서 경영권 승계, 노사 문제, 시민사회 소통과 준법 감시 등 그동안 지적됐던 문제에 대해 사과했다. 그러나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개운치 않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일방적인 사과문 낭독’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은 자녀에게 경영권을 승계하지 않고, 무노조 경영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무거운 표정으로 작심한 듯 입장문을 읽어나갔지만,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 빠져 진정성에 물음표가 달렸다. 시민사회와 노동계가 “말보다 실천이 먼저”라고 비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삼성피해자 공동투쟁’은 이날 삼성 서초 사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국민 사과는 사기극이다. 자녀에게 경영권 승계를 안 한다고 하는데 지켜봐야 할 일”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삼성의 노조 파괴 등으로 피해를 보았다는 이들은 ‘이재용을 감옥으로’라는 피켓을 들고 “수십 년간 이어진 노조 파괴 정책으로 발생한 노동자들의 피해에 대한 해결책은 없다”라고 핏대를 세웠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도 총수로 약속했던 말을 지키지 않은 전례가 있다. 이 회장은 12년 전 ‘대국민 사과 및 퇴진 성명’을 발표하면서 차명재산 실명 전환과 사재 출연 방침을 밝혔다. 당시 특검을 통해서 드러난 차명계좌 규모는 4조5000억원에 달했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 부회장의 사과에 대해 “법적인 잘못을 도덕적인 문제로 치환해 두루뭉술하게 사과하는 일은 제대로 책임지는 자세가 아니다”며 “앞으로 잘하겠다는 허황된 약속보다 그간 저지른 각종 편법·탈법·불법 행위를 해소하기 위한 계획을 제시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12년 전 이건희 회장도 차명계좌에 대한 실명 전환, 누락된 세금 납부, 사회환원을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 부회장은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한 뇌물공여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2심에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이 선고됐지만, 대법원은 2심을 파기하고 다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 중인 파기환송심에서 재판부의 권고에 따라 삼성준법감시위원회가 출범한 상황이다. 그리고 삼성준법감시위의 권고에 따라 이번 대국민 사과도 이뤄졌다.
시민사회는 이번 사과가 이 부회장의 재판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은 논평에서 “이 사과를 빌미로 진행 중인 이 부회장의 국정농단 재판에서 감형을 위한 어떠한 시도도 있어서는 안 된다”며 “이 부회장이 진정으로 자신의 과오를 씻고자 한다면 국정농단 재판과 삼성물산 부당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불법회계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제대로 죗값을 받는 것이 우선”이라고 밝혔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이번 사건의 본질은 이 부회장 본인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정경유착 및 경제범죄에서 시작된 것인데 사법적 책임을 지겠다는 최소한의 내용도 언급이 없었다”며 “자녀에게 경영권 승계를 하지 않겠다는 것은 본인의 형량을 줄이기 위한 언급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그리고 삼성의 해고 노동자 김용희 씨는 여전히 서울 강남역 폐쇄회로TV 철탑에서 300일 넘게 고공농성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