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 연출된다. 은퇴를 선언한 선수를 대상으로 프로야구 상벌위원회가 열린다.
지난 27일 오전 음주 운전을 하다가 적발된 박한이(삼성)는 곧바로 오후에 구단을 통해 은퇴 의사를 밝혔다. 그는 "음주 운전 적발은 어떠한 이유로도, 나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은퇴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면허 정지 수준인 혈중 알코올 농도 0.065% 상태로 운전하다가 대구 수성구 범어동 인근에서 접촉 사고를 냈다. 전날 술을 마시고 술이 완전하게 깨지 않은 상태로 운전대를 잡은 게 문제였다.
2001년 KBO 리그에 데뷔한 뒤 줄곧 라이온즈 유니폼만 입고 뛴 '원 클럽 맨'이다. 통산 안타도 KBO 리그 역대 3위(1위·LG 박용택·2411개)에 해당하는 2174개. 특히 올 시즌에는 리그 최고령 선수라는 훈장까지 달았다. 지난 2월 KBO가 발표한 2019년 소속 선수(586명) 중 나이가 가장 많았다. 철저한 자기 관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에 가까운 이정표를 곳곳에 세웠다. 그러나 19년 동안 쌓아 올린 공든 탑이 음주 운전으로 한 번에 무너졌다.
은퇴를 선택했지만 '징계'를 피하긴 힘들다. 정금조 KBO 운영본부장은 "두 가지가 남아 있다. 은퇴를 선택해서 구단 측의 신분 정리가 있어야 한다. 협회도 상벌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심의할 예정이다. 심의하는 건 확실하다"고 말했다. 박한이처럼 은퇴를 선언한 선수를 대상으로 상벌위원회가 열리는 것은 흔치 않다. 보통 현역 선수가 사건·사고를 저지를 경우 구단 징계에 KBO 상벌위원회 징계가 더해지는 구조다.
이럴 때 구단 대부분이 임의 탈퇴를 징계 방법으로 이용한다. 최근 음주 운전을 하다가 적발된 윤대영(LG) 강승호(SK)도 구단이 먼저 임의 탈퇴 결정을 내리고 협회 상벌위원회 결과가 나왔다. 임의 탈퇴로 공시되면 그날부터 선수단 훈련에 참가할 수 없고, 최소 1년간 선수로 뛸 수 없다. 1년이 지나도 소속 구단이 임의 탈퇴 해제 요청을 KBO에 하지 않으면 복귀할 수 없다. 그런데 임의 탈퇴는 은퇴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박한이의 경우 아예 은퇴를 못 박은 상황에서 상벌위원회가 열리게 됐다. 징계를 내려도 적용할 수 없지만, 일단 규정상 상벌위원회가 개최돼 죄를 논할 계획이다. 정 본부장은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징계를 논의하겠다"고 했다. 규정대로면 중징계다. KBO 규약 제151조 '품위손상행위'에 따르면, 음주 운전은 크게 4단계로 분류해 징계를 내린다. 단순 적발과 음주 측정 거부(음주 운전 확실시)의 경우 출장 정지가 각각 50경기(제재금 300만원·봉사 활동 70시간)와 70경기(제재금 500만원·봉사 활동 180시간)다. 그런데 박한이가 해당하는 음주 접촉 사고는 출장 정지 90경기, 제재금 500만원, 봉사 활동 180시간으로 수위가 높다. 징계 최고 수준인 음주 인사 사고 때 적용되는 출장 정지 120경기, 제재금 1000만원, 봉사 활동 240시간보다 약하지만, 출장 정지 때문에 시즌의 63% 일정을 소화할 수 없게 된다.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했다. 스스로 유니폼을 벗겠다고 선택했어도 음주 운전 적발에 따른 상벌위원회는 예정대로 열린다. 20년에 가까운 선수 생활을 강제로 마무리하면서 남은 것은 이제 KBO 징계다. 말 그대로 불명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