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곳곳에 베시크(러시아 국기)가 흩날렸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베시크를 머리에 두르고 망토처럼 걸치고, 깃대에 묶어 휘두르며 걷는 사람들이 우렁차게 외치는 이름은 '러시아'였고, 국민들의 부름에 응답하듯 전반 12분 만에 유리 가진스키가 선제골을 터뜨리자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는 떠나갈 듯한 함성에 휩싸였다. 스쳐지나가던 낯선 이들이 러시아의 득점 소식에 서로를 부둥켜 안고 환호성을 내지르는 풍경이 익숙했다. 16년 전 2002 한일 월드컵 때 붉은 티셔츠와 태극기로 중무장한 한국인들이 골이 터질 때마다 서로를 부둥켜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2018 러시아 월드컵 개막전이 열린 15일(한국시간), 국제축구연맹(FIFA)이 마련한 공식 행사 '팬 페스트'가 열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가는 색색깔의 국기로 물들었다. 이날 개막전의 주인공인 개최국 러시아의 국민들이 베시크를 두르고 거리로 쏟아져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경기를 치르지 않는 나라들의 국기도 제법 보였다. 지하철 2호선 넵스키 대로역에서 내려 팬 페스트가 열리는 코누셴나야 광장까지는 걸어서 약 10분 거리지만 펄럭이는 만국기 아래 각국 응원단이 벌이는 열띤 노상 응원전이 사람들의 발길을 붙들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김희선 기자
노상 응원전을 가장 치열하게 치른 이들은 개막전 바로 다음날인 16일 경기가 예정되어 있는 이란과 모로코의 팬들이었다. 유니폼과 국기, 부부젤라와 각종 악세서리로 장식한 이들은 코누셴나야 광장을 향해 걸어가면서 서로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자리에 멈춰 서서 목청 높여 자국 국가와 응원가를 불러댔다. 주로 이란 팬들이 먼저 도발하고 모로코 팬들도 피하지 않고 맞받아치면서 흥미진진한 응원전이 거리 곳곳에서 펼쳐졌다.
상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김희선 기자
이들 외에도 콜롬비아, 프랑스, 그리고 한국의 조별리그 상대인 스웨덴과 멕시코 팬들도 눈에 띄었다. 유명 관광명소이자 코누셴나야 광장 근처에 위치한 피의 사원 앞에서 만난 멕시코 팬들은 기자에게 포즈를 취해주며 "멕시코가 3-1로 한국을 이길 것"이라고 호승심 넘치는 선전포고를 하기도 했다.
다양한 국가의 팬들이 몰려든 팬 페스트 현장은 말 그대로 축제를 방불케 했다. 부부젤라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퍼지고 길거리 한복판에서 노래와 춤이 흥겹게 이어졌다. 영어가 서툰 러시아 자원봉사자를 대신해 서로 길을 알려주고, 각자 다른 국가의 팬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는 모습도 자주 눈에 띄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김희선 기자
물론 이날의 주인공은 개최국 러시아였다. 개막전의 주인공인 러시아 팬들은 이미 1만 5000여 명을 수용하는 코누셴나야 광장에 집결한 상태였다. 수용 인원은 일찌감치 한계를 맞았고 FIFA와 현지 LOC는 안전을 위해 경기 시작과 동시에 게이트를 닫았다. 덕분에 광장에 진입하지 못한 수많은 팬들은 제자리에 서서 발을 동동 굴렀고 장외 응원전을 펼치며 광장에서 들리는 중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장외 응원전이 펼쳐지던 순간 가진스키의 첫 골이 터지면서 러시아 팬들은 우렁찬 환호성을 터뜨렸다.
길거리는 물론 거리 곳곳의 펍도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의 개막전을 보며 맥주를 마시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어느 곳에도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길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응원 소리를 높이며 축제 분위기를 즐기는데 집중했다. 팬들의 열띤 응원 속에 개최국 러시아가 사우디아라비아를 5-0으로 완파하며 개막전을 승리로 장식하자 사방이 러시아 국가를 부르는 우렁찬 목소리로 뒤덮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김희선 기자
경기를 지켜보던 다른 나라 팬들도 기쁨에 열광하는 러시아 팬들에게 아낌없이 축하의 말을 건넸다. 기본적인 회화도 잘 통하지 않는 러시아지만 진심을 담은 축하의 말은 그 어떤 영어보다 잘 통하는 것 같았다. 성조기 무늬가 그려진 백팩을 맨 미국 관광객과 베시크를 두른 러시아 축구팬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분은 매우 특별했다. 반목과 배타적인 경계, 서로에 대한 증오까지 축구 앞에서 희석되는 모습에서 우리가 왜 월드컵을 '세계인의 축제'라고 부르는가, 그 답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기분이었다.
※에떠 러시아(Это Россия)는 러시아어로 “이것이 러시아다”라는 뜻으로, 일간스포츠가 2018 러시아 월드컵 현장에서 만난 생생한 소식들로 채워질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