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유나이티드는 2017년 프로축구 K리그 클래식(1부리그)를 강타한 팀이다. 7년 만에 정규리그 깜짝 준우승을 차지한 제주는 K리그 팀으로는 유일하게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16강에 올라 축구팬들을 놀라게 했다.
만년 중·하위권 팀인 제주를 강팀 반열에 올린 필살기는 역습 공격이었다. 미드필드진이 패스를 뿌리면 발 빠른 공격수들이 총알같이 적진으로 침투해 상대 수비의 숨통을 끊었다.
중앙 미드필더 권순형(31)은 총알을 장전하는 역할이다. 그가 볼을 빠르게 돌리면 공격진은 몰아치고, 여유롭게 발을 놀리면 숨을 고른다. 그가 쉬면 날카로운 총알을 갖고도 총구 밖으로 쏘지 못하는 셈이다. "내 킥과 패스가 득점 찬스로 연결된다는 생각으로 뛴다. 좋은 패스를 하면 마치 골을 넣은 것과 같은 기분이 든다." 6일 서울 둔촌동 한 커피숍에서 '중원사령관' 권순형을 만났다. 권순형은 제주의 '패스 마스터(Pass Master)'다. 리그 32경기에 출전한 그는 패스 성공률이 85%로 팀 내 1위를 기록했다. 리그 전체로 범위를 넓혀도 권순형의 패스 실력을 따라올 자가 많지 않다. 그는 필드 플레이어(30경기 이상 출전 기준) 중 7위에 올랐다. 1위 무랄랴(포항 스틸러스·88.8%)와 3.8% 차이고, 2위 오스마르(FC 서울·85.5%)와는 불과 0.5% 격차다.
중앙 미드필더로 나서는 권순형은 수비진에서 넘어온 공을 공격형 미드필더인 윤빛가람·이창민에게 패스를 이어 줘 공격 전개에 기여한다. 중원 싸움이 치열해 전방으로 공 배급이 어려운 상황에선 최전방 공격수인 마그노 진성욱 멘디 등에게 결정적인 패스 한 방을 찔러 주기도 한다. 제주 조성환 감독은 "워낙 패스 센스가 좋아서 (권)순형이가 공을 잡는 순간만큼은 벤치도 마음을 놓는다"고 칭찬했다. 이창민은 "순형이 형의 패스는 마치 대문 바로 앞까지 배달되는 택배 같다"고 말했다.
권순형의 '킥'은 지난 20년간 흘린 땀방울의 결정체다. 서울 잠원초 4학년 때 처음 축구화를 신은 그는 작은 체구에 무난한 실력을 가진 선수였다. 그런데 당시 최고 명문 동북중에 진학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또래보다 키가 5~6cm 작은 탓에 난다 긴다 하는 동급생과 공 경합에서 번번이 밀렸다. 왜소한 데다 특별한 장기도 없는 권순형은 코칭스태프로부터 외면받기 시작했다. 권순형이 킥으로 승부를 보기로 마음먹은 것도 이때다. "어떻게 하면 덩치 큰 선수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걱정하다 떠오른 게 패스였다. 상대와 부딪치기 전에 패스하면 힘이 좋은 상대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빠른 사람도 따라잡을 수 없는 게 공의 속도다."
권순형은 중학교에 입학한 뒤에 2년간 운동장에서 살았다. 모든 것은 패스를 잘하기 위한 연습이었다. 그는 100m 거리에 공을 놓고 맞히는 연습을 하는가 하면 골대를 조준해 슈팅하는 방식 등으로 킥의 세밀함을 키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오른발 끝은 예민해졌다. 마음먹은 곳이라면 어디든 공을 보낼 수 있는 수준이 됐다. 중학교 3학년 권순형은 마침내 간판 미드필더로 올라섰고, 같은 해 팀의 전국 대회 4관왕을 이끌었다. 킥 하나로 고교 무대를 평정한 그는 고려대의 유니폼을 입었다. 대학 3학년 때는 당시 한국 축구계를 뒤흔든 축구 천재이자 1년 선배인 박주영(서울)에게 에이스의 상징인 '등번호 10'까지 물려받았다. 권순형은 지금도 공을 더 정확하게 찰 궁리만 한다. "지금은 176cm다. 선수치고는 여전히 작은 편이다. 지금도 팀 훈련 뒤에 롱패스 10개를 추가로 찬다. 비록 10개지만 100일 동안 하면 1000개가 된다." 권순형은 씩 웃어 보였다.
권순형의 꿈은 '한국의 제라드'가 되는 것이다. 중앙 미드필더로 환상적인 킥 능력을 가진 스티븐 제라드(은퇴)는 1998년부터 2015년까지 18년간 리버풀에서 뛰며 710경기에 출전했다. '리버풀의 심장' '중원사령관' 등으로 불리는 그는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선수'다. 권순형이 제라드를 꿈꾸는 이유다.
"패스를 잘하려면 열심히 하면 되겠죠. 하지만 팬심(心)은 다릅니다. 저는 열정을 갖고 열심히 그라운드를 누비겠습니다. 내년엔 '패스 마스터'는 물론 '팬심 마스터'까지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