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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갓모닝] 633. 한가위만 같아라
옛날 한가위에는 진풍경이 있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먹어 약국 앞에 긴 줄을 섰다. 명절이라 문을 연 약국도 많지 않아 이 동네, 저 동네로 뛰어다녔다. 어쩌다 문을 연 약국을 발견하면 추석 기차표 예매하듯 길게 줄을 서고 몇 시간이고 기다렸다.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았던 우리 민족이 하루 먹을 것이 넘치는 날이 한가위였다. 음식들을 마음껏 먹다 보니 자연스레 배탈이 날 수밖에. 배탈이 나도 기분은 좋던 시절이었다. 그때마다 새삼 ‘한가위만 같아라’란 말이 실감 났다. 1년 내내 한가위처럼 먹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말은 하지 않는다. 여전히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이웃들이 많이 있지만, 국민 대다수는 그래도 풍성하게 먹고 있다. 마트마다 먹을 게 쌓이고 전화만 하면 온갖 종류의 음식이 배달된다. 외국 관광객은 한국 음식을 먹기 위해 방문한다.
과거 덴마크는 지금처럼 잘사는 나라가 아니었다. 선진국이 되기까지 매섭게 배고픈 시절을 겪었다. 자국에서 생산되는 최상품의 육류는 모두 외국으로 수출하고 내국인들은 곡류 위주로 소비했다. 그런데 뜻밖의 결과가 나타났다. 국민들의 평균수명이 고기를 즐겨 먹던 시절보다 훨씬 늘어났다. 오히려 잘 먹어서 생기는 병이 많았던 셈이다.
추석날에는 많은 분들이 극장에 간다. 예전에는 매표소 앞에서 길게 줄을 서서 표를 끊고 영화를 봐야 했다. 인기 있는 영화가 개봉하는 날에는 극장을 몇 바퀴나 둘러싸며 줄을 서야만 했다. 이제는 모바일로 간단히 예매하면 끝이다. 택시도 모바일로 잡으면 된다. 불편했지만 낭만이 있던 모든 일들이 모바일로 대체됐다.
나 같은 세대는 모바일이 불편하다. 하지만 젊은 세대들은 모바일이 없으면 일상생활이 힘들다. 초등학생들도 모바일이 일상이다. 코딩 수업을 하고 학교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가르친다. 숙제도 컴퓨터로 해야 한다.
대학교 풍경도 달라졌다. 출석은 강의실 앞에 설치된 지문 인식기로 한다. 수업 시간에 노트북과 태블릿 PC는 필수다. 교수가 강의하면 필기는 노트북으로 대신하고, 스마트폰으로 녹음까지 해 둔다. 도서관 자리도 모바일앱으로 예약한다. 불과 십여 년 사이에 급속히 사회는 변화했다. 모바일을 마치 자신의 또 다른 인공지능처럼 사용하는 세대들이 성장하고 있다. 그들이 사회의 중심이 되면 대한민국은 또 어떻게 변해 있을지 궁금하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고 했던 그 시절 한가위가 그리워진다. 할머니가 빚어 산처럼 쌓아 놓은 송편, 친척들과 뒷산으로 뛰어다니며 신나게 놀던 추석. 그런데 요즘 추석의 표정은 다르다. 추석 휴가를 해외에서 보내는 사람들이 많다. 차례는 지내는지 궁금하다.
여행도 좋고 쉬는 것도 좋지만 추석에는 조용히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조상의 산소를 돌보고 가족들과 차례를 지내는 일은 모두 나의 뿌리를 함께 생각해 보는 일이다. 이번 추석 휴일에는 기도를 쉬기로 했다. 다만 선원에 와야 하는 사람들이 있어 문은 열어 두려 한다. 어느 때보다도 긴 금년 추석이 영혼을 비우는 아날로그 같은 한가위가 됐으면 한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