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유망주' 꼬리표를 확실하게 떼어 냈다. 하나씩 자신의 최고 기록을 깨뜨리고 있다. 이제 믿음직한 선발투수로 자리매김했다. 프로 입단 11년 만에 드디어 꽃피운 삼성 백정현(30) 이야기다.
백정현은 큰 기대를 받고 입단했다. 지명 순위(2007년 2차 1라운드 전체 8순위)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유망주로 남았다. 스프링캠프에선 늘 팀 내 투수진 가운데 손에 꼽을 만큼 좋은 공을 던졌다. 오죽하면 사이영상을 세 차례 수상한 LA 다저스 에이스 클레이튼 커쇼를 빗대 '오키나와 커쇼'로 불렸다. 오키나와는 삼성이 수년간 일본 2차 캠프를 치른 장소다.
백정현은 지난해 팀 내 유일한 풀타임 투수였다. 한 번도 2군에 내려간 적이 없다. 성적도 따라왔다. 데뷔 후 개인 최다출장(70경기)·최다이닝(68⅔이닝)·최다승(6승3패)·최다홀드(9개)를 기록했다.
올 시즌 구단 내부에선 "'선발투수 백정현'을 재발견했다"고 들뜬 분위기다. 백정현은 필승조로 시작해 5월 중순부터 선발투수로 나서고 있다. 지난 18일에는 후반기 첫 경기인 울산 롯데전에 선발투수로 나서기도 했다. 후반기 첫 경기 등판 기회는 보통 팀 내 1~2선발에게 주어진다. 김한수 삼성 감독은 "백정현이 이렇게 잘할 줄 몰랐다"며 "예상보다 훨씬 좋은 활약을 보여 주고 있다"고 놀라워했다.
백정현은 올해 벌써 개인 한 시즌 최다이닝(70⅔이닝)을 소화했다. 시즌 성적은 6승1패 평균자책점 3.82. 25일 NC전에선 7이닝 4피안타 1실점으로 개인 한 경기 최다이닝과 첫 퀄리티스타트+(7이닝 이상 3자책 이하)를 기록했다. 또 선발 3경기 연속 퀄리티스타트(6이닝 이상 3자책 이하)로 안정감을 보여 주고 있다. 백정현이 "선발투수로 나서면서 야구가 더 재밌다"고 말하는 이유가 있다.
- 직구 평균 구속이 시속 130㎞ 후반대인데 상대 타자가 쉽게 공략을 못 한다.
"스피드는 빠르진 않지만 제구력이 좋아졌다. 또 변화구 구사가 늘어났다. 이전에는 타자들이 직구만 생각하고 노렸다면, 이제는 변화구까지 염두에 두니 상대적으로 직구의 효과가 좋아진 게 아닐까 싶다."
- 스스로 언급한 것처럼 중간계투로 나올 때보다 변화구 비중이 다소 높아졌다.
"구원투수로 나오면 주로 왼손 타자를 상대하니 직구와 슬라이더를 많이 던졌다. 그런데 선발 등판 때는 우타자를 상대할 기회가 많이 늘었다. 왼손 투수이니 상대팀에서 일부러 우타자를 많이 선발로 내보내는 것 같기도 하다. 우타자 승부 때는 자연스럽게 체인지업 구사 비율이 높아진다. (백정현의 체인지업 구사 비중은 지난해 대비 10% 넘게 늘었다.)
- 김한수 감독은 완급 조절 능력도 보인다고 평가했는데.
"계속 직구만 던지면 타자의 눈에 익숙해질 뿐 아니라 스스로도 힘이 빠진다. 완급 조절을 하려다 보니 변화구를 던지게 되더라. 또 경기 상황이나 볼카운트, 주자 상황에 따라 내가 힘을 써야 할 포인트와 힘을 쓰지 않아도 되는 포인트가 읽히는 것 같다."
- 지난해 막바지 4차례 선발 등판 경험이 큰 도움이 됐을 것 같다.
"그렇다. 지난해 9월 16일 SK전 선발 등판 경험이 특히 크게 도움됐다. 당시 한 이닝에만 6점을 내줬다. 중간에 나가서도 1이닝에 6점을 준 적이 없는데 선발로 그런 결과가 나와 '왜 그랬을까'를 한참 생각했다. 결국 선발로 나섰을 때도 구원 등판처럼 생각하고 던진 게 문제였더라.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보통 중간계투로 나서면 직구·슬라이더를 많이 던지는데, 선발과 똑같은 스타일을 유지하면 타선이 한 바퀴 돈 뒤에는 눈에 익기 마련이다. 아무리 공을 세게 던지려 해도 힘은 떨어져 있고. 이후 선발 때는 변화구를 좀 더 던졌다. 구원 등판 때 별로 구사하지 않는 체인지업도 던졌는데 괜찮았다."
- 최근 들어 탈삼진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일부러 의도하는 건 아니어서 특별한 이유는 모르겠다. 최대한 공을 많이 던지지 않고 아웃 카운트를 잡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 5월 첫 선발 등판 때와 비교하면 현재는 스스로 자신감이나 안정감을 느낄 법도 한데.
"매일매일 준비를 잘하고 있다. 휴식도 잘하고 있고. 중간 때와 달리 기분 변화가 거의 없다. 중간 때는 어제 잘 던져서 기분이 좋다가도 다음 날 못 던지면 너무 열을 받곤 했다. 감정 기복이 심했다. 선발은 그렇지 않다. 내가 4~5일 동안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나온다고 생각하니까 마음 편하게 던지는 것 같다."
- 선발 체질이었나 보다.
"신인 때는 선발투수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중간에서 결과를 내지 못했다. 선발 목표를 앞세우기보다 일단 중간에서 한 시즌은 좋은 결과를 내 보자고 생각했다. 오기라고 해야 하나? 그 후로 선발 욕심은 뒷전이었다. 지난해 풀타임 시즌을 보내면서 자연스레 막판에 선발 기회가 왔다. (지난해나 올해) 선발로 나서면서 계속 이 보직을 맡고 싶다고 생각했다."
- 스스로 이 정도 활약을 예상했나.
"그런 생각은 전혀 안 했다. 선발투수로서 해야 할 일, 못 던져도 6이닝은 끌어 주는 임무를 잘 마치자는 생각만 했다. 중간계투로 오래 뛰었기에 더욱 그렇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 사실 오랫동안 '만년 유망주'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던 문제다. 하지만 그동안 좋은 경험을 많이 했다. 처음부터 잘하는 선수였으면 좋았겠지만 앞으로의 활약에 따라 미래가 바뀐다고 생각한다."
- 요즘은 야구가 재밌겠다.
"선발 등판이 재밌다. 결과를 떠나 선발 등판 전부터 준비, 등판까지 이어지는 그 과정이 재밌다."
- 앞으로 보완점을 꼽는다면.
"많다.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을 좀 더 예리하게 가다듬으면 좋겠다. 지금보다 더 좋아져야 할 것 같다. 변화구를 통해 타자의 헛스윙 확률을 높이고 싶다. 그래야 타자가 속았다는 의미고, 또 공의 각이 예리했다는 의미라서다."
- 개인 첫 한 시즌 10승이 보인다. 시즌 목표는?
"물론 10승을 하고 싶다. 또 10승을 달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등판 때마다 항상 꾸준하게 6이닝은 던지고 싶다. 중간 투수를 해 봤으니까 누구보다 계투진의 부담을 잘 알고 있다. 선발투수는 이닝 소화 능력이 중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