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것을 기적이라고 한다면 한국 아이스하키 대표팀이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일궈 낸 것은 기적이 맞았다.
백지선(50·영어명 짐 팩) 감독이 이끄는 한국 아이스하키 대표팀은 지난달 29일(한국시간) 끝난 2017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세계선수권 디비전 1 그룹 A(2부리그)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감동적인 기적 하나를 썼다. 이들이 쓴 기적의 이름은 '한국 아이스하키 사상 첫 월드챔피언십(1부리그) 승격'이었다.
누구도 감히 기대하지 못했던 1부리그 승격을 일궈 낸 백지선팀이 지난달 30일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대회 도중 부상을 당한 한쪽 팔에 깁스를 한 채 선두로 걸어 나온 주장 박우상(32·안양 한라)을 필두로 차례차례 자랑스러운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귀화 선수 에릭 리건(29·안양 한라)은 안면 골절로 인해 오른쪽 눈에 피멍이 든 상태였지만 누구보다 기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2부리그와 3부리그를 오가던 한국이 아이스하키 '꿈의 무대'인 1부리그에 도전한다는 사실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래서인지 대회 준우승을 의미하는 은메달을 목에 건 선수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자부심과 자신감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기적을 쓴 선수들의 걸음걸이는 개선장군처럼 당당했고 만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환영 인파에 휩싸인 선수들을 지켜보던 정몽원(62·한라그룹 회장)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은 백 감독을 발견하고 그에게 다가가 두 손을 굳게 잡았다. 백 감독도 환한 얼굴로 정 회장의 손을 마주 잡았다. 한국 아이스하키의 기적을 설계하고 실천한 '두 남자'는 그렇게 서로 말없이 칭찬과 감사를 나눴다.
"정몽원 회장을 비롯해 코칭스태프, 선수들 모두가 열심히 노력한 결과다. 무척 기쁘다."
귀국 뒤 취재진 앞에 선 백 감독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다. 단순한 공치사는 아니었다. 정 회장은 "난 그저 판을 깔아 줬을 뿐이다. 모든 것을 실천한 것은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를 필두로 한 대한아이스하키협회의 노력이 없었다면 한국 아이스하키의 기적도 없었다.
'겨울스포츠의 꽃'으로 불리는 아이스하키지만 한국에서는 비인기 종목에 불과하다. 등록 선수 233명(남자)에 실업팀은 단 3개뿐이었고, 2014년에는 2018 평창겨울올림픽 개최국 자동 출전권도 얻지 못할 위기에 처했다. 당시 르네 파셀(67) IIHF 회장으로부터 "한국 아이스하키가 평창에서 망신을 당하면 그걸 허락해 준 우리도 곤란해진다"는 굴욕적인 말까지 들었다.
그러나 정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귀화 선수 충원과 외국인 감독과 코치 영입 등의 조건을 통해 자동 출전권을 따낸 협회는 본격적인 '평창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국제 경쟁력 강화를 위해 20대 초반의 젊은 선수 10명을 아이스하키 강국인 핀란드에 파견했고,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출신의 백 감독과 박용수(41·영어명 리차드 박) 코치를 영입했다. 브락 라던스키(34)와 맷 달튼(31·이상 안양 한라) 등 귀화 선수도 적극적으로 충원했다.
협회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 2월에는 고양에서 유로 아이스하키 챌린지를 개최했고, 3월에는 러시아 대표팀을 초청해 두 차례 친선경기를 치르는 등 강팀과 맞대결을 통해 선수들의 실력을 더 끌어올릴 수 있도록 했다. 덕분에 선수들은 다양한 경험을 쌓고 체격적으로 우월한 유럽 선수들과 경쟁에서 밀리지 않는 뒷심을 기를 수 있었다.
이 같은 협회의 설계를 링크 위에서 실천한 사람이 백 감독이다.
2014년 7월 부임한 백 감독은 한국 아이스하키가 변방의 약소국에서 1부리그 승격을 이룬 '다크호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앞장서서 이끌어 왔다. NHL 우승컵인 스탠리컵을 두 차례나 들어 올린 경력과 10년 넘게 쌓은 지도자 경험을 바탕으로 선수들을 장악한 백 감독은 팀의 체질부터 바꿨다. 특별 훈련으로 체력을 끌어올린 뒤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벌떼하키'로 1부리그 승격의 꿈을 이뤘다.
정 회장과 협회의 섬세하고 정확한 설계, 그리고 냉철한 분석과 판단을 통해 이를 실천으로 옮긴 백 감독의 호흡은 지금까지 완벽 그 자체였다. 앞으로 이들이 평창에서 또 어떤 기적을 보여 줄지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