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 15일 부평고와 천안농고의 제84회 전국체전 남고부 축구 결승전이 벌어진 군산공설운동장. 경기장에 들어서는 이근호-김승용-백종환(이상 당시 부평고3년)은 이미 정상에 오른 것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이들이 이토록 자신감을 보인 이유는 경기 시작과 동시에 드러났다. 전반 5분 만에 주장 이근호가 선제골을 뽑아냈고 전반 12분에는 공격수 김승용도 골을 넣었다. 질세라 수비수 백종환마저 전반 27분 골을 터뜨렸다.
백운기와 대통령배에 이어 최고 권위의 전국체전(결승 5-1승)까지 3관왕을 달성한 '부평고 전설의 3인방'이 고교 무대를 평정하는 순간이었다.
14일 부산 기장 동부산호텔에서 만난 김승용은 "고교 시절 우리는 무적이었다. 친구들끼리 '이번 대회는 우승하자'라고 얘기하면 실제로 그 대회 우승을 차지했을 정도였다"며 웃었다. 날카로운 킥이 주무기였던 김승용은 이근호와 함께 그 시절 최고의 투톱으로 이름을 날렸다.
둘은 유난히 잘 맞았다. 이근호는 "승용이는 내 플레이 스타일을 너무 잘 안다. 내가 공을 한 번 놓쳐도 어디로 움직일지 알고 있을 정도"라고 했다. 팔짱을 끼고 친구의 얘기를 듣던 김승용은 "근호는 첫 터치를 잘 못해도 다음 동작에서 반드시 볼을 받아낸다. 그러니 믿고 줄 수밖에 없다"고 했다.
두 친구가 전방에서 '북 치고 장구 칠' 수 있었던 건 든든하게 후방을 지키는 백종환의 존재 덕분이었다. 백종환은 "뒤에 있으면 어디가 흔들리고 어디가 탄탄한지 훤히 보인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에게 이런저런 쓴소리를 했다"고 말했다. 곰곰히 생각에 잠겨 있던 김승용은 "종환이는 마치 잔소리를 달고 사는 시어머니 같았다. 종환이한테 욕을 안 먹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뛰었다"고 했다.
셋은 축구부 친구들 사이에서도 절친한 사이였다. 고교 시절 운동부에서 합숙생활을 하면 한 번쯤은 치고받을 법하지만 이들에게 싸움은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이근호는 "이상하게 단 한 번도 다툰 적이 없다. 대신 셋이 모이면 늘 볼을 더 잘 찰 궁리만 했다"면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꼭 이겨야 하는 상대,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는 우리끼리 숙소에 모여 상대팀 경기 영상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수십 번씩 돌려보고는 했다"고 말했다.
김승용도 거들었다. 그는 "한 번은 근호가 축구에 집중하자고 대회 기간에는 자발적으로 휴대폰을 감독님게 반납하자고 했다. 지금 같으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난리쳤을텐데 이상하게 그때는 마음이 잘 맞았다"며 킥킥 웃었다. 부평고 시절 '코봉이(이근호)' '백남봉(백종환)' '와쌈(김승용)'이라는 별명으로 통했다는 이들은 '왜 그리 부르게 됐는 지는 까먹었다'면서도 여전히 별명으로 서로를 불렀다.
그랬던 세 친구가 14년 만에 다시 뭉쳤다. 나란히 K리그 클래식(1부리그) 강원 FC 유니폼을 입은 것이다. '승격팀' 강원은 2017시즌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목표로 삼았다.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은 정규리그 3위 내 진입 혹은 FA컵 우승시 가능하다. 목표를 높게 잡은 만큼 그에 걸맞는 스쿼드가 필요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 시즌 제주 유나이티드를 5년 만에 챔피언스리그로 이끈 이근호와 부리람 유나이티드(태국)에서 아시아 무대를 이미 경험한 김승용은 반드시 필요한 자원이었다. 2010년부터 강원에서 뛴 백종환은 "근호와 승용이가 우리 팀으로 온다는 말을 듣고 너무 신기했다. 고교 친구 셋이 프로팀에서 함께 뛴 사례는 아직 보지 못했다"며 웃었다. 김승용은 "친구들 얼굴에 주름이 몇 개 더 생긴 것 빼고는 고등학교 시절 그대로다. 정말 재미있는 축구를 한 번 해보고 싶다"며 기대감을 보였다.
하지만 마냥 즐거워만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올 시즌 주장 백종환, 부주장 이근호 그리고 김승용은 강원을 이끌고 2016년 챔피언스리그 우승팀 전북 현대, 정규리그 우승팀 FC 서울 등 클래식의 강호들과 싸워야 한다.
이근호는 친구들과 함께라면 해볼만 하다고 했다.
그는 "챔피언스리그 진출이 지금은 말도 안 되는 목표처럼 들릴 지 모르지만 고교 시절에 그랬듯 높은 목표를 잡아야 결과도 비슷한 수준에서 이뤄진다"면서 "무모한 도전이지만 충분히 해볼만 하다. 그래서 시즌 막판에는 승용이 종환이와 진짜 멋진 세리머니 한 번 해보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