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 4년 이상의 대형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척도인 퀄리파잉오퍼(QO)를 구단으로부터 받은 선수가 10명에 불과했다. 지난해는 20명이었다. 이마저도 선발투수 제레미 헬릭슨과 닐 워커가 구단의 QO를 수락하면서 장기계약이 가능한 선수는 8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펜투수 포지션만큼은 어느 때보다 풍년이다. 포스트시즌에서 불펜투수들의 맹활약으로 그들의 가치는 더욱 올랐다. 아롤디스 채프먼, 앤드류 밀러 같은 강력한 불펜투수의 존재는 강팀의 필수조건이 됐다. 채프먼을 비롯해 켄리 잰슨과 마크 멜란슨은 이번 FA시장 불펜투수 빅3 투수들이다.
지난주 메이저리그 윈터미팅이 시작할 찰나 빅3의 일원인 멜란슨의 샌프란시스코 이적 소식이 전해졌다. 계약규모는 4년 6200만 달러. 총액과 연평균 금액 모두 역대 불펜투수 기록을 경신했다. 종전 최다 총액은 조너선 파펠본의 4년 5000만 달러, 연평균 최고액은 마리아노 리베라의 1500만 달러였다. 최대어인 채프먼과 잰슨의 행선지가 결정된 뒤 멜란슨의 계약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당초의 예상과 달리 멜란슨이 가장 빨랐다.
멜란슨의 기록은 1주일이 채 지나기 전에 깨졌다. 월드시리즈 우승 멤버 채프먼의 계약 소식이 윈터미팅이 끝나고 얼마 안된 즈음 발표됐기 때문이다. 채프먼은 5년 8600만 달러의 최고 대우를 받으며 뉴욕 양키스로 돌아갔다. 연평균 금액으로만 계산해도 1720만 달러에 달한다.
채프먼과 달리 QO를 거절한 잰슨은 이전 소속팀 LA 다저스 이외의 팀과 계약을 할 경우 불리함이 존재했다. 구단이 QO를 거절한 선수와 재계약을 할 경우 아마추어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잰슨도 무난하게 연평균 1500만 달러 이상의 장기계약을 맺을 가능성이 높았고, 13일 다저스와 5년 8000만 달러에 합의했다.
5인 선발로테이션과 1이닝 마무리의 정착 등으로 인해 불펜투수의 비중은 갈수록 높아져왔다. 하지만 가치는 항상 절하돼 왔다. <스포트랙> 에 따르면 불펜투수의 평균연봉은 약 510만 달러로 메이저리그 모든 포지션 가운데 가장 낮다. 연봉 1000만 달러의 벽을 깬 시점도 2005년으로 10년이 갓 넘은 정도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월드시리즈 3연패를 달성했던 뉴욕 양키스는 2001년 2월 마무리 투수 마리아노 리베라와 4년 3999만 달러에 연장계약을 맺었다. 3999라는 숫자는 매우 상징적이다. 마무리 투수에게는 연봉 1000만 달러는 절대로 주지 않겠다는 조지 스타인브래너 구단주의 확고한 의지가 숨어 있었다.
그러나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활약을 펼친 리베라는 기어코 2005시즌을 앞두고 스타인브레너의 고집을 꺾었다. 2년 2100만 달러 계약을 맺으며 1000만 달러 벽을 깨는 데 성공했다. 벽이 한 번 무너지자 마무리 투수에게도 대형 계약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2005시즌이 끝난 뒤 빌리 와그너(뉴욕 메츠)의 4년 4300만 달러 계약은 최초의 4년 이상·연평균 1000만 달러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토론토는 B.J. 라이언에게 불펜투수 최초 5년 계약(4700만 달러)을 쥐어줬다. 라이언의 계약은 채프먼 이전까지 메이저리그에서 유일한 불펜투수 5년 계약이었다.
마무리 투수의 가치가 올라가자 셋업맨의 가치도 동반 상승했다. 2012시즌 라파엘 소리아노가 뉴욕 양키스와 맺은 3년 3,500만 달러를 시작으로 LA 다저스도 2013시즌 재기에 성공한 브라이언 윌슨에게 1년 1000만 달러짜리 계약을 줬다. 그리고 앤드류 밀러의 대성공이 이어졌다. 세인트루이스는 이번 FA 시장에서 통산 평균자책점이 4점대에 불과한 브렛 시슬과 전구단 트레이드 거부권이 포함된 4년 3025만 달러 계약을 맺었다.
그렇다면 불펜투수는 계약기간 동안 어떤 활약을 펼쳐야 말 그대로 밥값을 제대로 했다고 볼 수 있을까. WAR(대체선수대비승리기여도) 관점에서 살펴보면 2016시즌 불펜투수 상위 15명의 평균 WAR은 2.36이었다. 팬그래프가 제공하고 있는 1WAR 당 금액은 약 800만 달러다. WAR 2.36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1900만 달러가 된다. 채프먼과 멜란슨 같은 최상급 불펜투수는 2.0 이상의 WAR을 기록하면 어느 정도 충분한 활약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변수는 이같은 활약을 계약기간 내내 보여줄 수 있는지의 여부다. 미네소타와 4년 4700만 달러 연장계약을 맺었던 조 네이선은 2010시즌을 앞두고 토미존 수술을 받았다. 계약기간 중 2년 가까운 시간을 날렸다. 라이언은 5년 계약 중 2시즌만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으며, 마지막 시즌은 마이너리그에서 보냈다.
이들뿐만 아니라 실패사례는 많이 있다. 불펜투수의 장기계약에는 상당한 위험이 따른다. 구단이 선뜻 4년 이상의 계약을 제시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에 구단들은 최근 안전장치로 계약기간 중간 즈음에 FA를 선언할 수 있는 옵트아웃 조항을 삽입해 위험부담을 낮추려고 하고 있다.
물론 최근 10년 동안 불펜투수의 연봉만 오른 것은 아니다. 1994년 선수노조 파업 이후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는 메이저리그는 말 그대로 돈 잔치다. 연봉 3000만 달러 선수도 5명이 탄생했다. 하지만 불펜투수의 가치는 아직 최고 선수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그 과정도 마리아노 리베라가 없었다면 더 더뎠을 것이다.
2005년 이후 불펜투수 연봉 1500만 달러의 벽이 깨지는 데 12년이 걸렸다. 과연 2000만 달러짜리 불펜투수는 언제 탄생할 수 있을까.
반승주(야구공작소)
야구 콘텐트, 리서치, 담론을 나누러 모인 사람들. 야구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공유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