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추모식에는 강성복 경찰교육원장, 박종왕 제대군인정책국장, 김용해 대한민국 해군동지회 명예회장, 이봉엽 예비역 육군소장, 박우정 방송기자클럽회장,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 등이 참석해 헌화했다.
강성복 원장은 "경찰관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묻는다면, 차일혁 경무관의 말씀을 경청하라 말하고 싶다"며 "차일혁 경무관은 언제나 강자가 아닌 약자의 편에 서서 살아간 분”이라고 추모했다.
유족인 차길진 차일혁기념사업회장은 "호국경찰, 문화경찰, 인본경찰의 상징인 차일혁 경무관의 추모식을 경찰교육원에서 많은 후배 경찰관들과 함께 하게 돼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추모식이 열린 대강당 '차일혁홀'은 2009년 아산 경찰교육원이 고 차일혁 경무관의 호국경찰과 인본경찰 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붙였다. 차일혁은 17세 때 상하이로 가 중국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을 했다. 광복 후에는 일본 형사 사이가, 쓰보이, 하라다를 저격했다. 호국군 103연대장과 제15청년방위대 총무처장으로 일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 7사단 대위로 유격대를 조직하고 인민군과 싸웠다.
1950년 12월 경찰에 투신, 제 18전투경찰대 대대장으로 빨치산 토벌에 나섰다. 대원 75명을 이끌고 빨치산 2000명을 상대해 지켜낸 정읍 칠보발전소 전투로도 유명하다. 1953년 서남지구전투경찰대 제 2연대장을 맡아 그해 9월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했다. 이후 진해경찰서장과 공주경찰서장을 지냈다. 녹음기를 틈타 지리산 일대에 숨어있는 빨치산 은신처를 없애려고 화엄사를 소각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구례 화엄사를 구해낸 주인공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