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명의 좀비들이 몸을 기이하게 꺾으며 경련을 일으키는 장면은 할리우드 좀비물에 눈높이가 맞춰진 관객들에게도 꽤 큰 만족감을 줬다. 좀비 소재가 한국에서 상업영화로 제작된 건 '부산행'이 처음. 한국형 좀비물의 레퍼런스가 된 셈이다. 물론, 이 뒤엔 숨은 공신이 있었다. 리듬체조 출신 박재인 안무가는 '부산행'에서 보디 무브먼트 컴포저(몸의 움직임을 지휘하는 사람)로 활약했다. 부산행 KTX 기차에 탄 승객들을 일순간 좀비로 만드는 바이러스의 첫 숙주를 연기한 심은경을 비롯해 100여명의 좀비를 연기한 배우들의 모션을 모두 완성했다. CG인지 연기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몸을 기상천외하게 꺾는 좀비를 완성하기 위해 비보이 댄서들을 투입시킨 것도 박재인 안무가의 아이디어였다. '부산행'의 좀비 모션을 담당한 박재인 안무가를 1일 서울 강남구 무브스튜디오에서 만났다.
-'부산행'에 보디 무브먼트 컴포저를 맡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곡성'에서 좀비 모션을 만들었다. '곡성' 나홍진 감독님과 '부산행' 연상호 감독님이 친분이 있더라. 아마 내 짐작엔 나홍진 감독님이 연상호 감독님께 나를 추천한 것 같다. 어느 날 '부산행' 조감독이 스튜디오를 찾아왔더라. 누구인지 소개도 안 하고, 땀 범벅이 된 얼굴로 '('곡성') 래퍼런스를 보여주실래요?'라고 하더라. '내가 '부산행'에 100% 합류하는 게 결정된 것도 아닌데 어떻게 래퍼런스를 풀 수 있겠냐'고 했다. 며칠 뒤 다시 연락이 왔길래 래퍼런스를 들고 가서 감독을 만났다. 연상호 감독에게 내가 하게 되든, 다른 사람이 하게 되든 아마 2~3개월의 준비 시간이 필요할테니 빨리 결정을 해야할 것이라는 말도 했다. 그랬더니 얼마 안 돼 바로 같이 하자고 연락이 왔더라."
-'곡성'에는 어떻게 합류했나. "나홍진 감독님이 스튜디오에 찾아왔다. 영화 '추격자'를 500번 넘게 봤다. '추격자'를 정말 재밌게 봤기 때문에 같이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곡성' 시나리오를 받아서 읽는데 머릿 속에 한 장면, 한 장면이 다 상상이 되면서 정말 재밌었다. 그래서 참여하게 됐다. 나홍진 감독님은 황정민 씨가 굿 하는 장면, 환희가 빙의가 되서 몸이 꼬이는 장면, 정미남 씨(흥국)가 병원에서 경련을 일으키는 장면, 쿠니무라 준 씨(외지인)가 네 발로 움직이는 장면 등을 각각 나눠서 다른 느낌으로 모션을 준비하면 좋겠다고 하더라. 각각의 특징을 잡고, 모션을 완성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 각자의 유연성과 몸 상태 등을 고려하면서 모션을 만들어야했기에 더욱 힘들었다."
-'곡성'에서 좀비 모션을 연구했기 때문에 '부산행' 준비 기간을 단축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도움이 많이 됐다. 연상호 감독님이 인터뷰에서 나홍진 감독님이 '곡성'에서 좀비 모션 준비를 열심히 해서 상대적으로 준비 과정이 편했다고 했던데 그 말이 정답인 것 같다. 준비가 아예 안 된 상태에서 '부산행'을 했다면 더 힘들었을 것 같다. 각 좀비별로 특이한 포인트를 잡는 것도 힘들었을 것 같다."
-'부산행'에 등장하는 100여명의 좀비 연기를 한 배우들과는 얼마나, 또 어떻게 연습을 했나. "총 3~4개월 정도 걸렸다. 일단 50명 정도 좀비 연기를 잘하는 정예 멤버를 뽑아서 촬영할 때 잘 보이는 곳에 배치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야구부, 등산객, 군인 등 무리를 나눠 연습을 시켰다. 군인 좀비로 나온 분들은 영화 '대호'에 출연해 산을 타며 몸을 단단하게 만든 분들이라 체력이 좋더라. 나이가 좀 있거나 유연하지 않아서 다칠 수 있는 분들은 또 다로 분리를 해서 연습을 했다.
그렇게 각 좀비 떼 별로 다른 컨셉트를 잡고 연습해야했는데 그 과정이 좀 힘들었다. 현재 내가 사용하는 스튜디오가 딱 기차 한 칸 사이즈다. 그래서 세트 디자인 하는 분께 설계 도면을 달라고 해서 스튜디오를 기차 칸처럼 꾸몄다. 의자를 두고, 기차 칸 안에서의 움직임도 함께 연구했다. 극 중 대전 역에서 군인 좀비들이 쏟아지는 장면을 위해서 계단이 있는 한강에 가서 단체로 시뮬레이션을 하기도 했다. 좀비떼가 단체로 나오는 장면에선 1명, 1명 움직임을 잡고 슛(촬영)을 들어갔다.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바꾼 부분도 있지만, 큰 틀에선 움직임을 정하고 시작했다."
-심은경(첫 숙주)·우도임(승무원) 등 영화 초반 좀비연기를 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특히 압권이었다. "정말 열심히 연습했다. 특히 심은경 씨는 처음 연습을 왔을 때랑 촬영할 때 움직임이 확연히 달랐다. 허리가 뒤로 꺾이는 장면을 연기해야했는데 심은경 씨가 대역을 쓰는 게 싫다고 했다. 허리 꺾는 연습을 계속 했는데도 잘 안되니깐 와이어라도 차고 하겠다고 하더라. 정말 노력형 배우였다.
심은경 씨가 연기한 모든 장면은 100% 대역 없이 찍은 거다. 연습을 엄청 많이 했다. 심은경 씨에게 처음 물리는 승무원을 맡은 우도임 씨도 엄청난 노력을 했다. 컨셉트를 잡는 초반 작업부터 함께했고, 모션이 계속 바뀌어서 고생도 가장 많이 했다. 연습을 하도 많이 해서 그런지 현장에서 즉석으로 움직임을 주문해도 알아서 잘 하더라."
-심은경에게 했던 디테일한 요구사항이 있나. "처음 등장해서 경련을 일으키는 장면을 보고 관객들이 '써니' 심은경을 떠올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써니'가 떠오르는 순간 이 영화는 망할 거라고 생각했다. 영화의 첫 등장이고, 시발점이 되는 캐릭터라 잘 해보자고 했다. 심은경 씨는 어떤 이야기를 해도 다 흡수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더라. 또 그 만큼 노력도 많이 했다. 정말 대단한 배우라고 생각한다."
-각각의 좀비마다 다른 움직임을 만들어야해서 힘들었을텐데. "어느 순간 좀비들의 모션이 다 비슷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고민이 많았다. 좀비가 되는 과정도 다 달라야해서 여러가지 시도를 했다. 주요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의 경우, 참고할 만한 영화를 각각 다르게 추천해주기도 했다."
-완성된 영화를 본 소감은. "'오~괜찮은데?'라는 생각이 들더라. CG를 담당한 감독님의 공도 정말 컸다. 그 분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만족스럽게 나오지 않았을거다. 특수분장팀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현장에서 정말 케미가 좋았는데 그 결과물이 고스란히 나온 것 같아서 뿌듯하고 기뻤다."
-'부산행'은 한국형 좀비물의 레퍼런스가 됐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니었더라도 영화는 잘 나왔을거고, 좀비 모션을 만든 분이 주목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산행'으로 좋은 감독님을 만나고, 즐거운 작업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또 개인적으로 '부산행' 덕에 내가 도전할 새로운 공간이 생긴 것 같다. 리듬체조 선수에서 MBC 방송국 안무팀으로 7년간 활동하고, 뮤지컬과 가수 안무도 해봤다. 몸을 움직이는 건 다 해봤다고 생각했고, 일하는 분야에 있어서 더 이상 도전할 게 없고) 꽉 찼다고 생각했는데 '부산행'이 내게 새롭게 도전할 또 다른 공간을 만들어줬다고 생각한다. 다시 뭔가 새롭게 담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 같아서 행복하다."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장르가 있다면. "더 무서운 호러물을 해보고 싶다. '링'에서 여자 귀신이 TV에서 나올 때 더 무섭 나올 수 있었을텐데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리얼한 호러물에 참여하고 싶다."
-'댄싱9' 등과 같이 안무가들이 참여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심사위원을 맡을 생각은 없나. "제안을 받았던 적이 있지만 고사했다. 난 아직 춤을 추는 사람이기 때문에 춤을 추는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싶지 않다. 각자 가치관이 있고, 춤을 추는 나름의 이유와 방식이 있을텐데 그걸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고 싶지 않다. 나 역시 좋은 댄서이자 안무가로 기억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