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는 매년 공식 레코드북을 발행한다. 그 안에 온갖 기록이 담겨 있다. 팀, 투수, 타자 기록은 물론 홈런, 끝내기, 신인, 외국인 선수 기록까지 자세히 분류돼 있다.
각 항목마다 또 최초, 마지막, 최고령, 최연소, 최다, 최소 기록 등으로 다양하게 나눠진다. 한 경기가 끝나고 한 시즌이 끝날 때마다 기록의 역사는 조금씩 달라져간다.
야구만큼 다양한 기록을 집계하는 스포츠는 이 세상에 없다. 기록은 야구의 또 다른 의미이자 역사다. 은퇴한 레전드와 현역 선수를 이어주고, 야구팬 한 세대와 다음 세대의 추억을 연결하는 '다리'다. 야구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기록들은 그래서 숫자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기록을 위해 달리는 선수들
수많은 선수가 프로야구를 거쳐갔다. 그러나 레코드북 한 페이지에 이름을 남기는 행운은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선수들은 기록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던지고 치고 달린다.
꾸준함의 대명사인 삼성 박한이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올해 16년 연속 세 자릿수 안타와 역대 6번째 통산 2000안타에 동시 도전한다. 2001년부터 지난해까지 한 시즌도 빠짐없이 100안타 이상을 쳤다.
올해 100안타를 치면 팀 선배 양준혁의 역대 최다 기록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지난해까지 1944안타를 쌓아 올렸으니 2000안타까지 일거양득이 가능하다.
그러나 매년 풀타임을 소화해온 박한이는 요즘 몸이 여기저기 아프다. 박한이는 "빨리 기록부터 달성해야 나도 마음이 좀 더 편해질 것 같다"고 했다.
넥센 투수 신재영은 올해 데뷔전 이후 최다 연속 선발승 기록에 도전했다. 종전 기록은 kt 트래비스 밴와트가 SK 시절 달성한 5경기. 그러나 개막 다섯 번째 등판에서 첫 패전을 안아 무산됐다. 같은 경기에서 데뷔 후 최다 연속 이닝 무볼넷 행진도 30⅔이닝으로 마감했다.
그는 "아쉽기도 했지만 차라리 홀가분했다"고 했다. 대신 '기록의 사나이'가 되는 즐거움을 알았다. "올해 역대 한 시즌 최소 볼넷 기록(2015년 LG 우규민·17개)에 도전해보고 싶다. 가능하다면 한 자릿수 볼넷까지 노려보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신재영은 올 시즌 11경기에서 볼넷을 단 5개만 내줬다. 도전은 순항하고 있다.
◇기록을 못 채워 아쉬운 선수들
못다 세운 이정표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더 이상 기회가 없는 은퇴 선수에게는 더 그렇다. 강성우 삼성 배터리코치는 여전히 '포수 1000경기 출장'을 못 채운 게 못내 아쉽다.
딱 46경기만 남겨두고 2004년 SK에서 유니폼을 벗었다. 강 코치는 "1000경기를 뛴 포수가 역대로 몇 명 없다. 그래서 꼭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선수 생활 말년에 김동수, 박경완과 한솥밥을 먹었다. 스스로 "내가 '스페어 타이어'가 된 느낌이었다. 아쉽긴 했지만, 물러나는 게 맞았다"고 털어 놓았다.
역대 최고의 유격수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박진만 SK 수비코치는 더하다. 통산 2000경기 출장까지 불과 7경기를 남기고 부상으로 은퇴했다. 2000경기를 뛴 선수는 역대 7명뿐이다. 박 코치는 당시 "솔직히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7경기를 더 못 나간 아쉬움을 코치로서 채우겠다"고 했다.
정민철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1990년대 최고의 투수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런 그도 이강철 넥센 수석코치가 보유한 10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 기록에 두 시즌 못 미쳤다. 그는 "연속 시즌 10승 기록을 8시즌(1992~1999년)에서 마감한 것과 한번도 다승 1위에 못 오른 것이 가장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했다.
◇레전드의 가치, 기록으로 깨닫는다
기록은 오래 묵을 수록 가치를 높아진다. 한 선수의 이정표가 그만큼 역사의 한 페이지에 오래 남아 있었다는 의미라서다. 한 시절을 풍미한 레전드 스타가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순간은 청출어람의 후배가 그 기록을 넘어설 때다.
이종범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2014시즌 막바지에 하루가 멀다 하고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넥센 서건창이 역대 최초로 한 시즌 200안타의 위업에 도전하던 시기였다.
이 위원은 1994시즌 안타 196개를 때려내 이전까지 역대 한 시즌 최다 안타 기록 보유자였다. 서건창이 그 기록을 20년 만에 깼다. 이 위원은 "기록이 깨진 아쉬움보다는 서건창 덕분에 내 예전 활약이 다시 조명돼 고맙게 생각했다"며 "같은 해 기록했던 84도루도 언젠가 다른 후배가 깨줬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한대화 KBO 경기감독위원도 매년 개막전이 열릴 때마다 여러 기사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인물이다. 역대 개막전 최다 홈런을 비롯해 개막전과 관련한 각종 기록을 여러 개 남긴 덕분이다. 한 위원은 "개막 즈음만 되면 기자들 전화가 참 많이 온다"며 웃었다.
올해는 윤성환(삼성), 김광현(SK), 장원준(두산)이 차례로 통산 100승 고지를 밟았다. 역대 100승 투수들도 재조명을 받았다. 정민철 위원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정 위원은 "역대 최연소 100승도 좋지만, 오른손 최다승 투수라는 타이틀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며 "윤성환 투수라면 내 기록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나도 다시 거론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라고 했다.
◇기록 도전에 뒤따르는 부담감의 덫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고 했다. 값진 기록일수록 더 큰 부담감이 따른다. 기록은 그 압박감을 이겨낸 선수들에게 주어지는 훈장이다.
LA 다저스 류현진은 한화 시절 2009년과 2010년에 걸쳐 29경기 연속 퀄리티스타트(QS·선발 6이닝 이상 3자책점 이하)를 해냈다. 특히 2010년에는 개막 이후 23경기에서 연속 QS에 성공하면서 단일 시즌 세계 기록을 작성했다.
QS 기록을 집계하기 시작한 1952년 이후 밥 깁슨(1968년), 크리스 카펜터(2005년·이상 세인트루이스)가 22경기 연속 성공한 게 종전 최다 기록이었다. 당시 류현진은 "올 시즌 전 경기에서 QS를 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그러나 23경기 기록 달성 직후인 그해 8월 26일 목동 넥센전에서 끝내 연속 QS 행진이 중단됐다.
류현진은 이듬해 "지난해 못다 이룬 기록에 재도전할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곧바로 고개를 세차게 가로 저었다. "기록이 계속되는 동안 정신적인 피로도가 무척 심했다. 그런 부담 없이 매 경기 투구에 충실하면서 시즌을 보내고 싶다"고 토로했다. 강심장을 자랑하는 천하의 류현진도 대기록의 무게감을 감당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최근에는 롯데 황재균이 엄지발가락 부상으로 연속 경기 출장 행진을 '618'에서 마감했다. 2011년 7월 8일 문학 SK전에서 시작돼 올해 4월 29일 사직 NC전에서 끝났다. 현역 선수 최장 기록이자 역대 2위(OB 김형석·622경기) 기록에 4경기 차로 근접했던 상황. 그러나 황재균은 "더 이상 미련이 없다"고 했다.
지난해 햄스트링 부상을 당하고도 꾹 참고 경기에 나섰던 황재균이다. 그만큼 이 기록에 애착을 느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걸 훌훌 털어 버렸다. 황재균은 "기록 때문에 아픈 몸으로 출전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팀에 피해가 될 수 있다"며 "연속 경기 출장이 아닌 좋은 성적으로 인정받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