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이 아무도 영화 소재로 끄집어낸 적 없는 윤동주 이야기를 그려냈다. 지난해 영화 '사도'를 개봉할 당시 수많은 작품에서 다룬 사도세자를 어떻게 차별화해 그릴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다면, 영화 '동주'를 내놓으면서는 아무도 터치하지 않은 윤동주 시인의 이야기를 어떻게 최초로 풀어낼지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가 내놓는 답변은 의외로 심플하다. "역사를 날조하거나 과도하게 왜곡하는 건 금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잘못하면 욕먹는데, 실존 인물을 예의 없게 다루는 것을 나 스스로도 견딜 자신이 없다." 어떤 색깔을 입히거나 화려하게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담백하게 담으려고 했다는 의미다. 저예산 5억원 규모의 흑백영화로 제작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상업영화의 그릇에 담고 싶지 않았다. 또 사람들이 기억하는 윤동주라는 시인의 흑백 사진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이준익 감독의 소신은 통했다. '동주'를 통해 재조명한 윤동주 시인과 그의 평생 라이벌인 독립운동가 송몽규의 삶이 윤동주의 태명 '해환(해처럼 환하게 빛나다)'처럼 빛나고 있다.
-영화 곳곳에 윤동주 시인의 시를 배치한 게 평전과도 비슷하다. "그 뿐이겠는가. 연표도 영화 속 이야기도 평전을 토대로 최대한 사실에 입각해서 만들었다. 시의 배치는 시나리오를 쓴 신연식 감독이 구성한 것이다. 70퍼센트가 팩트라고 생각하면 된다. 기본적으로 실존 인물이나 이야기를 소재로 다룰 때는 그 역사를 날조하거나 과도하게 왜곡하는 걸 금한다는 전제가 있다. 평전에 없지만 허구로 만들어낸 쿠미 같은 캐릭터도 있지만, 대부분 고증에 입각한 내용이다."
-윤동주 시인의 이야기를 영화 소재를 다룬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유가 궁금하다. "4년 전 일본 도시샤 대학에 있는 윤동주 시비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가 죽은 원수의 나라에 그의 흔적이 남아있고, 그걸 기리는 사람이 있다는 게 묘했다. 거기서 모티브가 시작됐다고 보면 된다. 4년 동안 끌어온 오래된 숙제를 푼 기분이다. 이번 영화는 한국 관객만을 위한 영화는 아니다. 일본 관객이 봐도, 한국 관객이 봐도 거부감이 없을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통해 새로운 변별점을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일본 사람들이 봤을 땐 윤동주의 시를 좋아하는 모임이 많은데 그렇게 시를 좋아하면서도 정작 그 시인의 삶과 죽음까지 다 안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일본이 사랑하고 시비까지 만들어놓은 윤동주 시인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가치를 분명히 알게 하고 싶은 목적도 있다. 그의 시를 칭송한다면 그의 삶과 죽음을 아는 것도 중요한 가치가 아니겠나. 영화를 만들 땐 목표가 정확해야한다. 본질에 대한 모순을 파헤치고 싶었다."
-경험이 있기에, 실존인물을 그린다는 데 부담감은 덜 할 것 같다. "하하. 나는 항상 나 자신을 의심한다. 내가 실존 인물을 그린 적이 있다고 그 다음이 익숙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자만의 늪에 빠질 것이다. 나를 의심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내 성격인건지 모르겠지만, 영화를 다 찍고 나면 다음 영화를 찍을 때 전 작품에 대한 잔상을 모두 지운다. '동주'를 찍을 때는 '사도'의 잔상이 전혀 없었다. '사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처음부터 머리를 비우고 시작한다는 의미다."
-전 작 '사도'에선 많은 이들이 소재로 다룬 사도세자를 그리더니 '동주'에선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던 윤동주 시인의 이야기를 선택했다. 어떤 게 더 어려웠나. "딱 잘라 말할 수 있다. '동주'가 다 어렵고 부담스러웠다. '사도'는 일단 당대 최고의 배우 송강호와 당시 최고의 대세 배우 유아인이 일단 출연하지 않았다. 그 둘을 두고도 영화가 망한다면 연출자의 탓으로 끝날 수 있다. 그런데 '동주'는 그게 아니었다. '동주'의 강하늘과 박정민은 송강호 만큼의 존재감이 있는 배우는 아니지 않나. 배우가 가진 중량감이 좀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가 잘못 된다면 배우와 연출, 영화의 모든 짐을 내가 떠안을 수 있는 상황이라 더 부담감이 컸다. 그런데 지금와서 한 마디 할 수 있는 건, 만약 작품이 부끄러웠다면 이렇게 인터뷰를 하지 않을 것이다.(웃음)"
-흑백영화로 만들었다. 이유가 궁금하다. "의도했다는 표현 보다는 무엇에 집중하느냐를 두고 선택을 했다고 말하고 싶다. '동주'는 저예산 영화고 흑백이었다. 그렇다 보니 스펙터클하지도 않고, 장치적인 치장이 전혀 없다. 자, 그렇다면 관객들은 어디에 집중하겠나. 바로 인물의 관계과 심리, 감정에 오롯이 집중하게 된다. 인물에 집중하길 원해서 흑백영화를 택했다. 또 관객들이 그동안 많이 접했던 흑백 사진 속 윤동주 시인의 모습을 훼손하고 싶지 않았다. 컬러 영화로 찍으면 과거를 현재로 소환하는 느낌이지만, 흑백으로 찍으면 관객이 그 시대로 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흑백을 선택했다."
-윤동주를 어떻게 표현하고 싶었다. "결코 나약한 인물로 그리지 않았다. 총들고 싸우지 않으면 나약한건가. 윤동주 시인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인간이었다고 생각한다. 현재 시점에서 질문을 하나 던져보겠다. 갑자기 나라에서 한글을 쓰지 말라면서 한글로 글을 쓰면 감옥에 넣겠다고 한다고 하자. 그랬을 때 한글로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이라고 생각하나. 그런데 윤동주 시인은 한글로 시를 썼다. 나약한 사람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나."
-'동주'를 보면 윤동주로 시작해 송몽규로 영화가 끝난 기분이 든다. "정확히 내가 의도한 바다. 윤동주 시인으로 관객들을 모으고, 송몽규의 삶으로 마무리하는 것. 그게 바로 내가 이번에 바랐던 거다. 송몽규라는 인물을 꼭 제대로 그리고 싶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생을 마감했지만 송몽규의 묘소를 보면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송몽규는 윤동주 시인의 삶에서도 절대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윤동주 시인보다 먼저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공부도 잘했지만 열등의식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태생 조건부터 차이가 난다. 윤동주와 송몽규가 한 집에 사는데 윤동주는 주인집 장남의 아들이라면, 송몽규는 윤동주 고모의 아들이다. 즉 송몽규의 아버지는 데릴사위처럼 더부살이를 했다. 주인집 아들과 고종 사촌 관계에서 당연히 눈치 밥을 먹고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송몽규는 신춘문예에 당선되고도 크게 좋아하지 못 하고, 송몽규의 모친이 아들에게 윤동주 시인이 속상하지 않게 배려하라는 말도 하는 게 아니겠나."
-함께 작업한 강하늘의 매력은 뭐였나. "맑은 영혼을 가진 배우다. 천사다 천사. 마지막에 특고형사 앞에서 서명을 강요받을 때 두 인물을 교차로 컷을 넣었다. 그때 두 배우가 뿜어내는 에너지가 엄청나다. 강하늘에게 일부러 자극을 주려고 '박정민처럼 열심히 해라'라고도 했는데 오히려 강하늘은 '정민이 형이 연기를 원래 더 잘하는데요'라며 웃더라. 강철 심장이더라. 서로 연기력이 비교당할 수 있는 신에서도 흔들림 없이 연기를 하는걸 보고 대단한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문에 적혀있지 않는 디테일을 잡아내는 배우다."
-박정민은 어땠나. "신념과 소신이 있는 배우다. 그리고 정말 똑똑한 배우다. '전설의 주먹'과 '신촌좀비만화'라는 작품에서 박정민을 봤다. 두 영화를 보고, 송몽규 역에 캐스팅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가 송몽규 역을 하길 원했는데 거기에다가 연기까지 잘하니 박정민이 딱이었다. 박정민의 연기를 보는데 이물질이 끼어있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아주 대단한 배우다."
-'동주'가 개봉하며 4년 동안 묵혀둔 숙제를 풀었다고 했다. 다음에 풀어야할 숙제는 뭔가. "이제 시작해야되는데, 아직은 비밀이다. 준비 중인 작품이 있다." 김연지 기자 kim.yeonji@joins.com 사진=양광삼, 박세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