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강렬한 눈빛과 잘생긴 외모에 압도 당한다. 언제 어디서나 젠틀하고, 흉내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를 풍겨 정우성은 연예인들의 연예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일단 대화를 시작하면 특유의 유머 코드와 깊이감이 느껴지는 그의 생각·가치관에 또 한 번 놀란다. 이런 그의 외적·내적 매력이 다 버무려진 작품이 나왔다.
7일 개봉한 '나를 잊지 말아요(이윤정 감독)'. 그의 새 주연작이자 정우성의 이니셜을 따서 만든 제작사 더블유(W) 팩토리의 창립작품이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비주얼과 연기에 감탄하고, 제작 비하인드 스토리에 감동한다. 제작사를 차린 이유는 온전히 이번 영화 때문. '나를 잊지 말아요'로 연출 데뷔를 한 이윤정 감독과 정우성의 첫 만남은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때였다. 당시 배우와 스크립터로 인연을 맺었다. 이후 이윤정 감독은 고등학교 때 쓴 소설을 바탕으로 '나를 잊지 말아요'라는 단편 영화를 찍었고, 이를 장편 시나리오로 옮겼다. 당시 시나리오에 남자 주인공 이름은 W, 바로 정우성의 이니셜이었다. 작품의 독특한 구성이 특별하게 다가온 정우성은 선후배 제작자에게 시나리오를 대신 건넸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원안을 수정하자는 것이었다. 미스터리 멜로가 기본 틀인 영화를 로맨틱 코미디로 바꾸자는 제작자도 있었고, 상업적인 요소를 더 가미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이 때 정우성은 제작사를 차려 직접 제작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원안을 훼손하지 않길 바랐어요. 지켜주고 싶었어요. 단순히 의리로 시작한 일은 아니에요. 시나리오가 좋았기 때문에 가능했죠." 덕분에 '나를 잊지 말아요'는 감독이 처음 기획한 의도대로 미스터리 멜로 영화로 완성됐다. 작품엔 후배에 대한 의리, 선배 영화인의 배려심이 모두 들어가있다. 플러스, '멜로 깡패' 정우성의 여심을 녹일 눈빛 연기까지. -제작사로서 영화를 본 소감은 어떤가요.
"아무래도 영화 전반적인 것에 관여를 해서 그런지 여러가지 생각이 드네요. 우여곡절 끝에 내놓은 작품이거든요. 제작자로서 신인감독을 잘 이끌었는지 등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하게 돼요. 또 배우로서 많은 분들이 볼 수 있는 따뜻한 감성 멜로를 완성했는지도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제작을 하게 된 계기가 원안을 훼손하고 싶지 않아서였다고요.
"100% 온전히 다 지켜줄 순 없겠지만 최대한 원안을 훼손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아무래도 신인 감독이라 현장을 보는 능력이나 자신의 텍스트를 영상화로 실현했을 때의 간극이나 괴리감이 있잖아요. 그런 밸런스를 잡아주는 역할을 하다보니깐 수정된 부분이 있긴 하죠. 100% 원안을 다 지켜줬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감독이 영상 언어로 어떤 얘기를 하려고 했는지 관객들이 그 요지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했어요." -제작자로서 '이것'만은 지키자는 원칙같은 게 있었나요.
"(현장) 안전이요. 또 스태프들이 안전하고 편하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사실 한국 제작자들은 현장에 거의 나오지 않고, 현장에서 프로듀서들이 제작자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이번에 저는 제작자겸 배우로서 현장에서 계속 상주하면서 그동안 작품을 하면서 느꼈던 현장에서의 문제점이 드러나지 않도록 신경을 썼어요. 개인적으로 가치있는 시간이었어요." -이윤정 감독의 데뷔작을 제작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궁금해요.
"비단 우정과 의리 때문에 한 건 아니었어요. 대부분 영화판에서 후배들이 큰 선배 배우들을 워너비로 생각하지만 동시에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생각해 마음 속 장식장에 넣어두고 바라만 보는 게 있거든요. 그런 부분이 저를 자극했던 것 같아요. 신인 감독들이 좋은 작품을 가지고도 감히 선배라는 이유로 제안하지 못 한다면 그것 만큼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디있겠어요. 영화판의 세대간의 소통을 깨고 간극을 좁히려면 선배가 먼저 다가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또 이 작품은 시나리오도 충분히 매력적이었어요. 이야기 풀이 방식이 독특했고, '나를 잊지 말아요'만이 가진 특별함이 있었죠. 앞으로도 작은 규모지만 참신한 영화에 계속 많은 관심을 가질 거예요."
-제작자로서 배우로서 영화산업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할 것 같아요.
"한국영화는 메이저와 마이너가 나눠져있지 않아요. 모든 영화가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메이저 취급을 받고 있어요. 사실 '나를 잊지 말아요'는 제작비나 프로덕션 사이즈 등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했을 때 마이너급 영화예요. 메이저와 마이너를 나누지 않으면 신인 감독이나 스태프들이 메이저 영화판에 뛰어들었다가 좌충우돌하다가 낙오되는 경우가 많아지죠.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 하고요. 적은 버짓(예산)의 마이너 영화로 경험을 쌓고 그 다음 메이저 영화 판으로 와서 다른 영화와 경쟁했을 때 비로서 성숙한 인력이 제대로 평가받고 체계적으로 시스템도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또한 적은 예산의 작품과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대해 선배 영화인들이 계속 관심을 가져줘야 해요. 그래야 더 숙련된 스태프와 감독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모든 영화가 100억원 버짓의 천만 영화가 될 수 있겠어요. 한국 영화가 더 건강해지려면 중형 버짓의 200만~400만 영화가 더 많이 나와야된다고 생각해요."
-김하늘과는 처음 연기호흡을 맞췄어요.
"캐스팅에 관여한 건 아니지만, 좋은 캐스팅이었다고 생각해요. 처음 촬영장에서 김하늘 씨와 앵글에 함께 들어간 모습을 보고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어요. 멜로는 어울림이 중요한데 그 어울림이 느껴지더라고요. 오래 사랑하는 분들을 보면 닮아간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 점에서 사랑 얘기를 할 때 이미지가 닮은 남녀가 연기를 하면 보는 사람들에겐 더 큰 믿음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김하늘 씨와는 이번 작품에서 처음 만났는데 참 바르고 깨끗한 이미지예요. 여배우들은 여배우 라는 단어 때문에 처세술이 생기고, 보여지는 연기를 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그런데 하늘 씨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자기 감정 표현에 솔직했고, 담백한 사람이었어요. 궁금증이 많은 소녀같은 느낌이랄까요. 천진 난만한 소녀의 느낌도 있었어요."
-캐스팅 후 김하늘 씨가 먼저 전화해서 만나자고 했다던데요.
"맞아요.(웃음) 제가 제작자이기도 하잖아요. 처리할 일들이 많아서 바빴어요. (웃음) 그 부분은 미안했어요. 배우들은 작품을 선택하면 빨리 촬영에 들어가길 원하고, 작품에 대한 얘기를 나누길 원하거든요. 그런데 뭔가 정리할 부분이 남았고, 구체적으로 세부사항이 가시화되면 만나려고 했어요. 뜨뜻미지근하게 만남을 미룬 이유죠. 그랬더니 하늘 씨가 '오빠, 제가 먼저 연락해야돼요?'라며 전화를 했더라고요. 그래서 맛있는 걸 사줬어요. 근데 하늘 씨는 또 장점이 맛있는 거 사주면 금방 잊어요."
-감정신이 많았어요.
"몰입하는 데 힘들진 않았어요. 캐릭터의 힘이 있기 때문이었죠. 상대 배우와의 교감도 좋았고요."
-눈빛 연기가 인상적이었어요.
"기억을 잃은 캐릭터지만 잠재의식 속에 있는 기억까지 삭제된 건 아니잖아요. 잠재의식 속에서는 아픔에 발버둥을 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서 공허한 눈빛에 아픔이 느껴지는 눈빛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주실지 모르겠네요."
-극 중 캐릭터 석원처럼 기억을 잃어버린다면 찾으려고 발버둥 칠 것 같나요.
"그럴 것 같아요. 좋은 기억만 있을 수 없잖아요. 아픈 기억도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모든 기억 하나 하나가 인생 드라마를 만드는 물줄기잖아요.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치부하는 분들도 있는데 전 반대예요. 아픈 사랑도 그 사랑을 하는 순간만큼은 얼마나 진실했는데요. 그 진실했던 순간을 간직해야죠."
-아픈 사랑을 간직하고 있나요.
"네."
-정우성 표 멜로는 어떤 차별화가 있을까요.
"직구라는 것? 감정을 직구로 표현하는 것 같아요. 요즘 기사를 보니깐 저한테 '멜로 깡패'라는 수식어를 달아주시더라고요.(웃음) 최근에 알았어요. 이번 멜로로 더 강한 '멜로 깡패'가 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