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33)는 이제 여유를 되찾았다. '먹튀'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하고, 자신을 향한 어떤 비난에도 웃을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됐다. 어두웠던 터널과도 같았던 과거가 그를 단단하게 단련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코 떠날 수 없었던 그라운드에서 그는 지도자로서 제2의 인생을 꿈꾸고 있다. 이정호는 "선수 시절을 한국시리즈 1차전에 비유한다면, 나는 크게 패했다. 이제 다가올 2차전을 위해 만만의 준비를 해 꼭 승리하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표현했다.
이정호는 고교 졸업 당시 최대어로 손꼽혔다. 대구상고 시절부터 시속 150km에 이르는 빠른 직구를 구사했고, 변화구의 제구력도 상당히 좋았다. 같은 학년의 부산고 추신수(32·텍사스)와 함께 유명세를 탔다. 2000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추신수와 함께 대표팀의 좌·우완 에이스로 활약했다. 이때만 해도 이정호는 추신수보다 더 전도유망한 투수였다.
고교 3학년의 이정호는 미국 메이저리그의 러브콜을 마다하고, 연고지인 삼성에 2001년 1차 지명으로 입단했다. 삼성은 당시 고졸 최고 대우인 5억3000만원의 계약금을 이정호에게 안겼다.
그러나 주변의 기대가 너무 컸을까. 이정호는 삼성 시절 부상에 시달리며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이후 2004년 말 FA(프리에이전트) 박진만의 보상 선수로 현대로 이적했다.
넥센으로 팀이 바뀐 뒤에도 부상은 그의 발목을 잡았다. 팀에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던 이정호는 결국 2010년 11월 구단의 허락하에 임의탈퇴선수 신분으로 해외 진출의 문을 두드렸다. 이정호는 "솔직히 말해 해외에 나가고 싶은 욕심은 없었다. 그저 내게 기대를 걸고 기회를 줬지만, 매번 부진한 모습을 보여 죄송했다"고 회상했다.
이후에도 부상으로 수술대에 오른 이정호는 프로 통산 35경기 출장에 1승 1세이브 1홀드·평균자책점 6.07의 기록을 남기고 프로 무대를 떠났다. 고교 최대어가 부상으로 무너진 것이다.
이정호는 그라운드를 떠나서는 살기가 힘들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시간을 보내던 그는 2011년 말 국내 최초의 독립야구단인 고양 원더스에서 직원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선수가 아닌 프런트로 그라운드에 설 생각을 한 것이다.
원더스 식구가 된 그는 "정말 행복했다"고 말한다. 그는 "나도 아파봤고, 프로에서 힘든 시간들을 견뎌왔기에 선수들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가 있었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이렇게 행복한 것임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원더스가 올 시즌을 끝으로 공식 해체를 선언하면서 그도 다른 길을 찾아 떠나야 한다. 이정호는 "좋은 지도자가 되고 싶다는 목표를 세웠다. 기술적인 부분은 물론 마음까지 만져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 삼성에서 현대로 옮긴 후에 미국 진출을 타진했었다.
“주위에서 추신수가 미국에 나가서 잘하니까 너도 한 번 나가보라는 얘기를 했는데, 그런 건 신경 안썼다. 사실 내가 팀에 그런 요청을 했던 것은 삼성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들어온 뒤 2010년까지 부상과 수술, 재활을 반복했다. 마운드에 올라가 공을 던진 것은 정말 잠깐이었다. 그런 생활이 반복되면서 스스로에게도 많이 지쳐 있었다. 팀에도 민폐 같더라. 그래서 내 스스로 내 길을 찾아보고 싶었다. 히어로즈에 요청할 때에도 ‘팀에 민폐 끼치고 싶지 않다. 국내 팀에는 가지 않고, 몸을 만들어 해외에 도전해보겠다’라고 말했다. 고맙게도 흔쾌히 허락했다.”
- 절치부심의 마음으로 나왔는데, 부상이 또 다시 발목을 잡았다.
“또 다시 어깨가 말썽이었다. 어깨 수술을 한 번 하고 나니까 두 번은 못하겠더라. 그래서 야구공을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 팔꿈치는 100번 째라고 하면 째겠다. 그만큼 어깨 수술은 힘들다.”
- 여러 부상과 재기의 아픔 등을 겪고도 그라운드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야구 진짜 힘들다. 근데, 그만큼 좋으니까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야구는 비유하자면 여자친구 사귀는 기분이다. 좋을 때는 엄청 좋은데, 여자친구가 말썽 피우면 괴롭고, 때론 나를 아프게 하기도 한다. 여자친구 만나러 가면 설레이는 것처럼 야구장에 출근할 때 늘 설레인다. 야구도 중독이다.”
- 원더스는 어떻게 들어가게 된 것인가.
“2011년 10월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했다. 재활을 위해 서울에 올라와 있었는데,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을 때 마침 고양 원더스에서 사람을 뽑는다고 해서 지원서를 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면접을 봤다. 주위에서 친구들이 면접에서는 시사 상식도 물어본다고 해서 신문 보면서 공부했던 것도 생각난다. 면접에서 하송 고양 단장님이 '네가 직원을 하다보면 다 후배들인데, 허드렛일을 할 수 있겠냐'고 하셔서 '당연하다'고 답했다. 다행히 합격했다.(웃음) 운이 좋았던 것 같다.”
- 선수로 뛰고 싶다는 생각도 해봤을 것 같다.
“애초 면접을 봐서 들어갈 때도 재활이 끝나고 나면 선수로 전향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후에 고양 원더스가 창단한지 얼마 안 돼서 김성근 감독님이 훈련 방법이 마음에 안드셨는지, 스태프를 다 모아 놓고 격양된 목소리로 ‘애들은 한참 멀었는데, 선수들에게 더 밀착해서 지도하라’고 주문하시더라. 그 자리에서 감독님이 나에게 ‘너는 선수로 뛸 건지, 프런트로 일할 것인지 분명히 하라’고 말씀하셔서 단장님의 허락하에 선수 유니폼을 입었다. 그때가 2012년 겨울이었는데, 선수 전향해서 첫 캠프를 일본으로 갔다. 캐치볼을 시작으로 근력 운동도 하고, 거리를 늘려 하프피칭도 했다. 거리도 꽤 나왔고, 몸 상태도 크게 문제가 없었다. 잘 돼가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도 좋고 뿌듯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캠프 마치고 한국에 들어가서 본격적인 피칭을 시작해야지 마음 먹었다. 문제는 귀국을 열흘 앞둔 날 찾아왔다. 공을 던지고 있는데, 어깨가 아파왔다. 선수는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한 직감이 있는데, 통증이 예사롭지 않더라. 약이나 주사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다. 검사 후 의사가 수술 날짜를 잡자고 하더라. 그래서 미련없이 야구를 포기하기로 마음 먹었다.”
- 다시 직원으로 돌아왔을 때는 마음이 심란했을 것 같다.
“처음에는 감독님이 선수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 아무 말도 안하시고 그냥 먼 산만 바라보셨다. 단장님은 구단에 남아 일을 하라고 했지만, 감독님이 안된다고 하셨다. 구단 직원으로 들어와서 선수로 전향했다가 아프다고 하니까 다시 직원으로 받아주면 다른 선수들의 기강은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 이유였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안타까웠는지 단장님이 나를 본사로 데리고 가서 일을 시켰다. 솔직히 현장직에 비해 적성은 안 맞았지만 언젠가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일했고, 다행히 지난해 트라이아웃 때 다시 현장직으로 복귀했다.”
- 원더스에 많은 애정이 있는 것 같은데, 아쉽게도 창단 3년 만에 해체를 하게 됐다.
“정말 아무 것도 모르다가 당일 날 들었다. 무엇인가로 얻어 맞은 것처럼 머릿 속이 멍했다. 설 자리를 잃은 선수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 옆에서 지켜본 김성근 감독님은 어떤 분이신가.
“김성근 감독님의 야구를 보고 재미없다고 하거나, 싫다고 하는 분들도 많은데, 사실 승부가 갈리는 스포츠에서 지는 것만큼 재미없는 것은 없다. 이기려고 덤비는 야구를 재미없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기기 위해 올라가는 과정이 재미없다고 해서 김성근 감독 야구 자체를 폄하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기는 야구를 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들이는 모습을 지켜봐온 나로서는 더욱이 그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상대 전력분석 자료를 갖고 찾아가면 감독님이 직접 자료에 형광펜까지 칠하면서 공부하신다. 이기기 위한 과정들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이다."
- 고양 원더스의 해체로 또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좋은 지도자가 되고 싶다. 아픔과 실패의 쓴 맛을 알기에 선수들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실패를 반복하는 사람이 없게끔 도움을 주고 싶다. 그게 내가 가장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