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상반기 극장가에서 한국영화의 성적표는 초라했다. 슈퍼히어로와 거대 로봇 등을 앞세운 할리우드 영화의 공습에 맥을 못 췄다. 올 초 800만 관객을 넘어선 '수상한 그녀'와 '끝까지 간다'를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화제작도 나오지 못했다. 각각 현빈과 류승룡이라는 톱스타를 내세운 '역린'과 '표적'이 각각 384만명과 284만명의 관객을 동원했지만, 두 배우의 이름값에 비하면 실망스러운 결과다.
이후 톱스타와 유명 감독을 앞세운 한국 영화들이 줄줄이 개봉됐지만, 톱스타의 명성에 금만 가는 흥행 성적표를 받았다. 이런 가운데 정우성이 주연을 맡은 '신의 한 수'(조범구 감독)가 '톱스타 영화' 잔혹사에 마침표를 찍었다.
▶'신의 한 수' 흥행이 반가운 이유
17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 전산망 집계에 따르면 영화 '신의 한수'(조범구 감독)는 16일까지 누적관객수 263만 259명을 기록하고 있다. 개봉일인 3일에 18만명의 관객을 동원해 단번에 1위에 등극했다. 이는 31일만에 할리우드 영화가 아닌 한국 영화가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게 된 것.
지난달 개봉 이후 줄곧 국내 극장가를 독식하며 '박스오피스 깡패'라고 불리던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이하 '트랜스포머4')를 단번에 꺾은 것이다. 청소년관람불가라는 핸디캡과 스크린 수('신의 한 수' 661관, '트랜스포머4' 999관)·상영횟수('신의 한 수' 3490회, '트랜스포머4' 4259회)의 압도적인 차이에도 1위 자리를 수성하게 된 것이라 의미가 깊다. 개봉 10일째였던 11일 오후에는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는 한국 청소년관람불가 영화 중 최고 흥행기록을 보유한 '아저씨'(628만명)와 '신세계'(468만명) 보다도 빠른 기록이다. 현재는 10일 개봉된 또 다른 할리우드 대작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과의 맞대결을 펼치고 있다.
▶바둑과 액션의 조화, 이 영화 사랑받는 이유
'신의 한 수'는 '신선들의 놀음'이라고 불리는 정적인 바둑과 동적인 액션을 절묘하게 결합했다. 일반 관객들에게는 생소한 '바둑'이라는 소재에 돈과 조폭들이 개입된 '내기'를 더하는 과감한 한 수를 뒀다. 일반 바둑판에는 바둑을 두는 두 사람, 그리고 흑돌·백돌만이 존재하지만 '신의 한수' 속 바둑판 위에는 억대의 돈과 목숨이 걸려있다. 때문에 바둑판에 한돌, 한돌 올리는 동작이 치열한 전투신을 보는 듯한 묘한 긴장감을 유발시킨다. "스포츠 바둑이 아닌 내기 바둑를 선택해 액션과의 매치를 더욱 살리려 했다"는 조범구 감독의 의도가 제대로 먹혀든 것.
한편 칼부림이 난무하는 핏빛 액션 오락 영화로서의 방점을 찍는다. 정우성은 긴 팔다리를 이용해 보기만 해도 시원시원한 역동적인 액션을 선보이고 '절대악' 살수 역의 이범수는 날렵하고 빠른 액션을 구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의 한 수'는 바둑에 대해 문외한이라 할지라도 상영시간 118분이 결코 지겹지 않다. '패착'(지게 되는 나쁜 수), '착수'(바둑판에 돌을 놓다), '포석'(전투를 위해 진을 치다), '행마'(조화를 이루어 세력을 펴다), '사활'(삶과 죽음의 갈림길) 등 바둑용어를 풀이해 놓은 챕터별로 구성돼있는 영화는 마치 만화책을 한권 한권 꺼내보는 듯한 재미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