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숨바꼭질'(허정 감독)이 충무로의 흥행공식을 깨트리며 '콘텐트만 좋으면 성공할수 있다'는 모범사례가 됐다. 흔히 말하는 한국영화의 흥행공식은 ''스타마케팅에 넉넉한 제작비, 경험많은 감독과 가열찬 홍보' 등이다. 실제로 이 조건을 충당하는 작품의 타율이 좋은 건 사실. 그럼에도 '숨바꼭질'은 스타마케팅 부재, 저예산, 그리고 신인감독의 연출이라는 3대 핸디캡을 고스란히 가진 상태에서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둬 눈길을 끈다.
개봉 27일째인 9일까지 552만 9792명(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을 모았다. 손익분기점인 160만명의 3.5배에 달하는 수치다. 역대 한국 스릴러영화 흥행순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살인의 추억'(03)을 꺾고 기록도 갈아치웠다. 앞서 유사한 약점을 가지고 히트작이 된 '더 테러 라이브'의 예도 있다. 하지만, '숨바꼭질'의 경우 '더 테러 라이브'보다 더 적은 예산에 티켓파워를 논할만한 배우 한 명없이 '맨땅에 헤딩하기'를 시도한 작품이라 더 화제가 되고 있다. '숨바꼭질'은 어떻게 핸디캡을 극복하고 '대박 흥행작'이 됐을까.
▶스타마케팅 부재
'더 테러 라이브'에는 그나마 영화계의 대세라고 불리는 하정우가 있었다. 하정우 한명 만으로 충분한 홍보효과를 누렸던 셈이다. 하지만, '숨바꼭질'은 안방극장에서 주로 활동했던 손현주와 문정희·전미선을 내세웠다. 연기력으로 두말이 필요없는 배우들이지만 영화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을만한 화제성이 떨어져 우려를 자아냈다. 주연배우 손현주 조차도 "드라마에 주로 출연하던 손현주가 영화계에 들어와 작품을 망쳤단 말을 들을까 두려웠다"고 속내를 밝혔을 정도다. 캐스팅 소식이 들렸을때 영화계 전반에서도 "캐스팅이 약해 힘들것 같다"는 말이 돌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불리한 캐스팅이 관객을 모으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손현주는 과거의 잘못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결벽증에 시달리는 캐릭터를 섬세하게 잘 살려내 '역시 베테랑'이란 말을 들었다. 안방극장을 통해 친숙해진 이미지 때문에 40·50대 관객까지 극장으로 불러들였다. 스릴러 영화에 중년층 관객이 몰리는건 이례적인 일이다. 문정희 역시 신경증적 증상까지 보이는 악역을 맡아 섬뜩함이 느껴지는 연기를 보여줬다. 손현주의 아내를 연기한 전미선도 두려운 상황에 처한 여성의 심리를 잘 묘사해 스릴러의 재미를 살렸다. 같은날 동시에 개봉한 '감기'가 장혁·수애 등 스타들을 내세웠는데도 '숨바꼭질'의 연기파배우들을 당해내지 못했다.
▶저예산, 25억원대 장편영화
'숨바꼭질'은 순제작비 25억원이 들어간 영화다. 충무로 상업영화 평균제작비의 하한선에 해당하는 수준. 앞서 '더 테러 라이브'의 순제작비가 35억원이라 알려져 화제가 됐는데 그보다 더 적은 금액이 쓰였다. 동시기 극장에 걸린 '설국열차'의 제작비가 450억원, '감기'도 100억원에 육박하는 돈이 들어갔다. 결국 만듦새에 있어 차이가 나지 않을수 없다.
예산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완성도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결국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길 뿐. 촬영회차를 줄이고 정해진 시간 내에 좋은 장면을 얻어내는게 관건이다. 결과적으로 '숨바꼭질'이 '돈 안 들인 티'가 나지 않게 잘 완성된건 제작팀과 배우들간의 이해와 협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숨바꼭질'의 한 관계자는 "영화 촬영인데도 드라마처럼 바쁘게 진행됐다. 배우들의 협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인데 촬영장의 맏형 격이었던 손현주가 솔선수범해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줬다"고 전했다.
손현주도 "배우들에게 '촬영시간을 칼같이 지켜달라'고 당부했다. 시간을 아끼는게 주어진 예산으로 최대한 멋진 작품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경험없는 신인감독
배우들이 전원 베테랑으로 구성된데 반해 막상 감독은 신인이다. '숨바꼭질'에 참여했던 한 스태프는 "예산은 적고 배우들은 전부 연기파다. 그런데 감독은 '초짜'였다. 자칫 잘못하면 영화가 산으로 갈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걱정이 됐다"고 말했다. 뿐만이 아니다. 허정 감독이 직접 쓴 시나리오가 읽는 사람을 숨가쁘게 만들 정도로 탄탄하게 만들어졌던건 사실이지만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 산다'는 설정 등 개연성이 떨어지는 부분도 있었다. 경험이 없는 감독이 어설프게 연출했다가는 화면상에서 시나리오가 가진 약점이 고스란히 드러날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개봉후 일각에서는 '숨바꼭질'에 대해 '스토리가 빈약하다' '디테일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그렇지만 우려했던 것처럼 약점이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선배들이 참을성있게 내 얘기를 잘 들어줬다"던 허정 감독의 말처럼 배우·스태프들이 신인감독을 존중하고 따라줬기 때문에 감독의 뜻대로 영화가 완성될수 있었다는 전언이다. 범인이 주인을 죽이고 집을 차지하는 과정 등에 대한 묘사가 정교하진 않았지만 107분이란 러닝타임 내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만드는 연출이 '재미'를 찾는 관객의 욕구를 채워줬다. 누구나 공감할만한 상황을 설정하고 현대인의 불안심리를 자극해 잔인한 장면 없이도 '무서운 영화'를 만들어낼수 있었다는 평가다. 현재 허정 감독은 '더 테러 라이브'의 김병우 감독과 함께 충무로 최고의 '루키'로 불리며 차기작에 대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