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한 성북동의 한 음식점. 지인들과의 식사가 한창 무르익은 저녁시간, 음식점 주인이 한 번 맛보라며 술 한 병을 가지고 나왔다. 나는 술에 조예가 깊은 주인이 개인적으로 빚은 술이려니 생각하며 한 잔을 받아 마셨다. 그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술은 어사주가 아닙니까?" 내 말에 주인은 나보다 더 놀라는 눈치였다. "어머, 술만 마시고 어떻게 아셨습니까? 술맛으로 어사주를 판단하긴 여간 힘든 일이 아닌데요." 나는 오랜만에 맛보는 어사주 맛에 깊이 빠지고 말았다.
어사주란 조선시대 궁궐에서 왕이 신하에게 하사하던 술이었다. 안동 소주, 경주 법주와 함께 서울엔 어사주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 왕조가 일제에 의해 막을 내리고 일제 강점기와 6.25사변 등 역경의 역사를 거쳐 오면서 그 맥을 찾기는 더욱 힘들어졌다.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과 결혼한 이방자 황태자비를 정성껏 모시던 분이 있었다. 조선 궁궐 문화의 산증인이자 학술적으로 귀한 위치에 계시는 한상복 여사님이시다. 궁궐 내 의식주 문화의 전통을 잇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 분은 다름 아닌 우리 외할머니의 수라간 친구셨다.
외할머니는 나와 60년 차이 나는 정해년 띠 동갑이었다. 은진 송씨 양반 가문의 딸로 태어난 외할머니는 자매들이 영친왕 친구와 결혼하거나 외국유학을 떠나 예술가가 되던 중에 홀로 궐에 들어가 험난한 궁 생활을 했다. 오직 왕의 여자만 돼야 했던 궐 생활은 외할머니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줬다. 남들이 볼 수 없는 귀한 책을 볼 수 있었고, 남들이 모르는 요리비법을 수라간에서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일제는 왕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최소 인원만 남기고 궁궐 사람들을 내쫓았고 외할머니도 할 수 없이 출궁해야만 했다.
궐 밖으로 나간 외할머니는 중인 가문과 늦은 혼례를 올리신 뒤에도 늘 "은진 송씨는 재가를 하지 않는다"며 가문에 대한 프라이드를 잊지 않으셨다. 어린 나를 키우신 외할머니의 음식은 그야말로 대한민국 최고였다.
가난했던 시절, 별반 좋은 재료도 아니었지만 외할머니의 손을 거쳐 나오는 음식은 기가 막혔다. 특히 뜨끈한 콩나물국밥은 정말 신기했다. 아무리 봐도 콩나물 한 줌에 소금 한 줌이 다인 것 같았는데 맛은 끝내줬다.
언젠가 한 지인이 TV의 음식 소개 프로그램을 보다가 "저건 재료가 좋아서 맛이 좋은 겁니다. 5만 원 짜리 갈치와 만 원 짜리 갈치가 같은 맛일 수 있겠습니까?"라고 평했다. 그때 내가 한 마디 했다. "좋은 재료로 만든 음식엔 한계가 있습니다. 최고의 요리사는 비싸지 않은 재료로도 훌륭한 맛을 낼 줄 알아야 합니다."
조선 왕실 수라간 출신이던 외할머니의 음식 맛 덕분에 나는 성북동 음식점에서 어사주를 분별할 수 있었다. 주인은 어사주를 절대 상업적으로 팔 계획이 없다면서 말을 아꼈다. 알고 보니 그 분의 어머니가 한상복 여사를 지극히 모셨기에 받을 수 있었던 비법이었다고 한다.
외할머니의 음식 맛은 나의 어머니에게 전해졌다. 어머니의 맛은 선고께서 공주경찰서장 시절 공주 교육계의 사모님 H씨에게 전수되었다. 그 사모님은 여동생과 함께 한국전통요리의 대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으니, 외할머니의 맛은 지금까지도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셈이다. 최고의 화가는 화구를 탓하지 않고, 최고의 대목수는 연장을 탓하지 않는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