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 역대 최고령 승리 투수는 제이미 모이어(51·콜로라도)다. 모이어는 아들 또래의 빅리거들과 경쟁했고, 25년간 활약하며 통산 269승 209패 평균자책점 4.25를 기록했다. 은퇴 직전이던 지난해 4월에는 49세 150일 만에 승리를 거둬 리그 역사를 새롭게 썼다. 2009년에는 필라델피아에서 박찬호(40)와 한솥밥을 먹어 국내 야구팬들에게도 익숙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모미어의 직구 최고 구속이 시속 130㎞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대신 120km 정도의 '거북이' 체인지업을 무기로 '롱런'했다. 강속구 투수가 즐비한 세상에서 이른바 '느림의 미학'을 실천한 셈이다.
지난 23일 문학 SK전에서 보여준 NC 이재학(23)의 투구는 과정만 놓고 봤을 때 '한국판 모이어'를 연상시키기 충분했다. 이재학은 이날 6⅓이닝 동안 5피안타 1실점(1자책)하며 시즌 네 번째 퀄리티 스타트(6이닝 이상 3자책 이하)를 달성했고, 아울러 시즌 3승(1패·평균자책점 3.10)째를 올렸다. 직구 최고 구속은 141km에 불과했다. 상대 타자를 압도하기에는 2% 부족했다.
하지만 개인 시즌 최다인 8개의 삼진을 잡아내는 위력을 발휘했다. 비결은 바로 직구 스피드를 상쇄한 체인지업이었다. 8개의 삼진 중 체인지업으로 잡은 게 6개였고, 모두 헛스윙 삼진이었다. 125~127km대에서 형성된 체인지업에 노련한 SK 타자들의 방망이가 헛돌았다. 4-1로 앞선 4회 무사 2·3루 위기 상황에서는 박정권(32)-박진만(37)-조인성(38)을 상대로 모두 결정구로 체인지업을 던져 삼진-땅볼-삼진으로 실점 위기를 넘겼다.
경기를 직접 중계한 하일성 KBS N 스포츠 해설위원은 "좋은 각에서 공이 떨어지더라. 너무 일찍 떨어지면 타자가 속지 않고, 너무 늦으면 볼이 되는데 타자를 속이는 정확한 지점에서 공이 딱 떨어졌다"고 말했다. 이어 "체인지업이나 포크볼은 공이 가운데로 몰리면 자칫 장타로 연결되기 쉬운데 그런 것도 거의 없었다"고 평가했다. 이날 만큼은 체인지업의 컨트롤이 완벽에 가까웠다는 의미였다.
이재학은 생각은 어떨까. 그는 "삼진이 8개인 줄 몰랐다"며 "맞춰 잡는 유형의 투수여서 욕심 없이 카운트를 잡은 게 좋은 결과로 나온 것 같다"고 몸을 낮췄다. 이어 "우타자를 상대로 오늘 체인지업이 잘 들어갔다"고 만족스러워했다.
지난 17일 삼성전에서 9이닝 8피안타 6탈삼진 2실점하며 구단 역사상 첫 완투를 기록했지만 결과는 아쉽게 패전이었다. 이재학은 "당시 마지막 위기에서 고심 끝에 투심을 선택했지만, 체인지업을 던질 걸 후회 되더라"며 "오늘은 직구 컨트롤이 잘 되지 않아 자신감 있게 결정구로 체인지업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위기 상황에서 가장 자신 있는 구질로 타자를 상대한 것이다.
그는 "고등학교(대구고) 때부터 삼성 권오준 선배 투구폼을 보고 체인지업 연구를 많이 했다"며 "당시 코치님도 사이드암은 체인지업을 던져야 한다고 강조하셔서 집중해 훈련한 게 빛을 본거 같다"고 회상했다. "이제 시작이 아니라, 아직 시작도 안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그의 말처럼 '느림의 미학'을 보여준 이재학의 '2013 시즌'이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