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드라마 뿐 아니라 공연계에도 팩션 열풍이 번지고 있다. 팩션이란 역사적 사실 위에 상상력을 가미해 만들어낸 가공의 이야기를 말한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와 드라마 '대풍수' 등이 최근 눈길을 끌고 있는 팩션의 대표적인 예다. 실존인물의 드라마틱한 인생사에 가상의 캐릭터와 스토리를 더해 기발한 내용을 만들어내고 있다. 팩션 사극 뿐 아니라 근현대사의 주요 인물이나 사건들을 재구성한 작품들도 눈에 띈다.
▶'대풍수' '마의' 등 브라운관 팩션 열풍
과거 사극은 역사적 위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교과서에 등장할 법한 스토리에 극적인 구성을 더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왕세종'이나 '불멸의 이순신' '인수대비' 등이 그 예. 그러나 근래들어 역사 속 실존 인물과 가공의 인물을 한데 얽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성균관 스캔들' '공주의 남자' 그리고 얼마전 종영한 '아랑사또전'과 '신의'까지, 그야말로 브라운관은 팩션 사극으로 넘쳐나고 있다.
200억원 제작비와 2년여에 걸친 준비기간으로 화제를 모은 SBS '대풍수'는 고려말 한낱 변방의 무장이었던 이성계에 풍수지리학자로 나오는 허구인물 지상을 투톱으로 내세워 스토리를 전개한다. 철저한 고증과 더불어 미니시리즈 제작비의 20배에 달하는 의상비, 상상을 더한 세트, 역사적 인물의 신선한 해석은 최근 불고있는 팩션사극 열풍에 정점을 찍었다는 평가. 두자릿수 시청률을 간신히 넘기는 힘겨운 행보를 보이고 있지만 제작진은 이제 성인분량이 등장한 만큼 앞으로 보여줄 것이 더 많다는 자신감을 표하고 있다.
월화극 1위를 달리고 있는 MBC '마의' 역시 정통사극이라기 보다는 팩션에 가깝다. 말을 고치는 수의사에서 임금을 고치는 어의 자리에 오른 조선 최초 한방외과 백광현 역 조승우는 실존인물을 연기하지만 주변은 모두 상상 속 인물이다.
내년에도 브라운관 팩션 사극 열기는 뜨겁다. 내년 3월 방송예정인 김태희의 첫 사극 SBS '장옥정, 사랑에 살다'는 극중 침방 나인이자 조선 패션디자이너인 장옥정 이 조선의 보염서에서 화장품을 제조하는 내용을 담는다. 이제까지 수차례 드라마로 제작됐던 장희빈을 단순한 악녀로 표현하지 않고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할 예정.
SBS 특별기획 김영섭 부국장은 "이처럼 작가의 상상력에 기댄 팩션 사극들이 계속 선보이는 것은 다양한 주제나 소재를 자유자재로 등장시킬 수 있는 데다 사건과 인물의 변주폭을 극대화 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사극이 역사 교과서 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우리 환경에서 팩션 사극은 여전히 매력적인 장르"라고 설명했다.
▶'광해' 열기 이어 '퍼스트 레이디' '관상' 등 팩션 주목
올해 충무로 팩션열풍을 대표하는 작품은 두말 할 것 없이 '광해, 왕이 된 남자'다. 19세기까지 광기어린 폭군으로 알려졌다가 20세기에 와서 개혁을 시도한 선군으로 인식된 조선 15대 왕 광해를 소재로 삼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사라진 15일간의 행적을 바탕으로 '폭군 광해와 선군 광해는 다른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라는 기발한 상상력을 도입해 흥미를 자아냈다.
'광해'에 앞서 400만 관객을 모으면서 흥행에 성공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역시 팩션사극. 스토리의 밀도보다는 웃음을 전면에 내세우는 코미디지만 엄연히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만든 영화다. 차태현과 오지호가 연기한 캐릭터 이덕무와 백동수가 조선후기 실존인물이며 실제로 처남과 매부 관계였다. 서빙고에 관한 내용 역시 역사적 기록과 일치한다.
현재 제작중이거나 제작을 마친 팩션도 많다. 송강호와 이정재·백윤식·김혜수 등 호화캐스팅으로 벌써부터 화제를 모으고 있는 '관상'이 좋은 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계유정난에 가상의 캐릭터인 조선 최고의 관상가를 투입해 호기심을 자아내고 있다.
올해말 개봉예정인 '퍼스트 레이디-그녀에게'는 새누리당의 대선후보 박근혜의 어머니 고 육영수 여사의 일대기를 그린다. 육여사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극적인 만남과 이별을 다룬 멜로영화다. 이 역시 실제 인물과 사건을 토대로 만든 팩션이다.
공연계에서는 국립극단이 '꿈' '꽃이다' 등에 이어 삼국유사 프로젝트의 네번째 작품 '멸'을 무대에 올리며 팩션열풍을 이어가고 있다. 정보석이 주연을 맡은 이 연극은 삼국시대를 현대적인 이미지로 풀어내 눈길을 끈다. 지난달 26일부터 무대에 오른 뮤지컬 '삼천'도 의자왕의 삼천궁녀가 3000명이 아니라 불교 용어 '삼천'으로 표현된 한 명의 궁녀였다는 설정으로 만들어낸 팩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