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기를 이끈 지도자 여운형·박헌영·이승만의 기일(忌日)이 공교롭게도 같다. 모두 양력 7월 19일이다. 이것이 우연일까.
일간스포츠에 ‘차길진의 갓 모닝’을 연재하고 있는 나로선 자못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민족의 리더로 상반된 길을 걸었던 세 분이 해는 다르지만 같은 날 운명한 것을 보면 보통 인연은 아니다.
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난 여운형 선생. 독립운동가로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임시의정원을 지낸 뒤 1920년에는 소련공산당에 가입한다. 1933년에는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에 취임, 언론을 통한 항일운동을 했으며 1945년 광복이 되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해 위원장이 됐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해 스스로 부주석이 된 뒤 10월에는 인민당을 조직해 당수가 됐다.
그러나 1946년 좌우합작운동이 일어날 때 좌측의 대표로 좌파와 우파의 중간자적 역할을 하면서 반대파의 심한 견제를 받으며 정치적 입지가 위태로워졌고 1947년 7월19일(음 6.2) 19세 청년에 의해 혜화동 로터리에서 두 발의 총성과 함께 눈을 감았다. 호방한 인품으로 많은 이들이 따랐던 여운형 선생의 최후로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안타까웠다.
1900년에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박헌영 선생. 그의 인생도 파란만장했다. 서자(庶子)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해 경성고교에 입학, YMCA에서 영어를 독학으로 공부할 만큼 언어에 소질이 있었다. 미국유학을 준비하던 중 1920년 3.1운동이 터지자 정치적으로 망명해 중국 상해에서 고려공산당에 가입한 뒤 철저한 공산주의자의 길을 걸어간다.
1922년 국내 귀국했다가 공산주의자혐의로 복역한 뒤 출소한 그는 동아일보·조선일보를 거쳐 화요회 멤버로 활동했고 해방 후엔 공산당 재건을 위해 주력해 그해 9월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된다. 1946년 7월 위폐사건이 터지자 영구차행렬로 위장해 북으로 탈출한 뒤 11월 남조선노동당 부위원장이 된다. 1948년 북한에 정권이 수립되자 부수상이 되지만 이내 실격됐고 53년에 숙청돼 55년에 사형이 언도된다. 정확한 그의 사형일자는 확인할 수 없지만 대체로 7월19일 경(음 6.1)으로 보고 있다.
이승만 박사의 기일도 7월 19일(음 6.21)이다. 1875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난 이박사는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 철학박사학위를 받은 뒤 활발한 해외 독립운동활동을 한다. 1945년 해방 후 귀국한 그는 우익민주진영 최고지도자로 좌익세력과 투쟁했으며 1946년에 남한단독정부수립계획을 발표한다. 1948년 대한민국 초대대통령이 된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국내 공산주의자를 분쇄했고 일본에 대한 배일강경노선을 고집했다.
여운형·박헌영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고 대한민국 대통령까지 됐지만 1960년 부정선거로 4.19혁명이 일어나자 하야해 하와이 망명생활 중 7월19일 운명한다.
이들의 운명은 소통의 메시지를 전한다. 의리란 ‘빚’이다. 우리는 전생으로부터 서로 간에 갚아야할 빚이 있기에 마주하는 것이다. 소통이란 서로간의 빚을 잘 갚는 것이다. 기일이 같은 세 분은 서로가 묵은 빚을 남겼다.
만약 여운형·박헌영·이승만 박사 세 분이 영계에서 소통할 수 있다면 우리나라 또한 마음의 문을 연 소통이 시작될 것이다. 좌·우·중도 노선 세 분이 동시에 지지하는 후보, 다시 말해 세 가지 빚을 잘 갚는 인물이 대한민국 차기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으며, 또한 북한의 변화기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